국사봉의 혼 의병장 심남일 장군 이야기

기고
국사봉의 혼 의병장 심남일 장군 이야기
  • 입력 : 2021. 09.28(화) 08:49
  • 영암일보
김오준
영암군 금정면 국사봉은 심남일 장군의 의병 본진 ‘호남의소’가 자리 잡았던 봉우리다. 호남의소 본부는 끈질긴 왜경들의 추격과 보조원들의 밀고 때문에 99고랑이 넘는 덕룡산과 가지산을 번갈아 본진을 옮겨야 했고 600여명이 넘는 의병들도 5개 부대로 분산 배치했다. 호남 최대의 의병 ‘호남의소’는 일명 남일파 심남일 장군이 이끌었으며 부대의 중심에는 ‘영암 의병’들이 포진되어 주축을 이뤘다. 국사봉 채일봉을 거점으로 남평.능주.보성.강진.장흥.해남.나주.무안 등 전남 중.남부지역을 장군의 호남의소가 완전히 장악하였다.
심남일 장군은 1871년 2월 10일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새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수택이요. 삼남지방 제1의 의병장을 꿈꾸고 남일로 개명했다. 일찍이 학문을 닦아 향리에서 향교의 장의.도유사를 역임했으며 서당 훈장을 지낸 명망있는 선비였다. 본관은 청송으로 향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사서삼경을 독파한 학문적 배경지식이 두텁고 인물 됨됨이가 큰 그릇이었기에 훗날 영암 의병장 박평남.박민홍이 장군의 학문과 인품에 감동해 충성을 맹세하고 휘하 부장이 되었으며 남평의 의병장 권택도 국사봉 담판에서 승복해 장군의 모집책과 모사가 된 일화는 지금까지 전설로 전해온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통끝에 의병을 거의할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장군은 의병장 죽봉 김태원 장군의 아우인 의병장 김율의 부장이 되어 장성.영광.함평에서 왜군과 항전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김율의 휘하에시 의병장 수업을 제대로 한것 같다. 김율이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추대를 받아 의병대장이 되어 군율을 엄히 하고 의병의 진용을 재정비해 새롭게 출발했다.
정미의병은 1906년 면암 최익현이 '개문입적'의 '위정척사론'으로 호남 유생들운 독려하고 장성 선비 노사 기정진의 '양물금단론'과 격문이 기폭제가 되어 전라도 의병은 불길이 타올랐다. 영암에서도 면암 최익현의 제자 영보 유생 신준성이 면암의 장례식에 다녀와 덕진의 설락제에서 유생들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분을 참지 못해 실신하자 이를 지켜보던 박평남이 박민홍과 신예교.이희초와 거의 해 100여명이 일시에 의병에 참여했고 나주출신 박사화의 지원하에 한때 의병의 숫자는 수 백명이 되었고 '호남창의소'의 깃발 아래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후 심남일 장군이 2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국사봉에 본진을 차리자 박평남 부대가 심 장군의 지략과 인품에 감명을 받아 무조건 합류했고 이어서 나주 남평출신 의병장 권택도 장군과 국사봉에서 담판 후 100여명이 합세해 의병은 600명이 넘어 세를 떨쳐 호남의병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심남일 장군 휘하 의병장들의 주축은 영암출신 의병이였다. 호남의소의 전투력은 막강하여 나주의 전해산 부대를 측면에서 지원하기도 했고 화순의 의병장 안규홍과도 연합작전을 전개했으며 1908년 2월8일 금정면 농소의 용천천에서 심남일.전해산.안규홍 의병장 등 12명의 의병장들이 회합을 갖고 연합투쟁도 결의했다. 그후 1908년 8월24일 보성 문덕전투에서 안규홍 부대와 심남일 부대가 연합했으며 1908년 10월22일 함평 용진산 전투에서 심남일 부대와 전해산 부대가 연합했고 1909년 2월 보성 웅치전투. 3윌8일 남평거성동 전투.5월12일 보성천동 전투에서는 심남일.전해산.안규홍 3부대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후 의병활동은 전라도 곳곳에 전개되어 일제는 전전긍긍 한채 밤이 되면 왜놈들은 십리도 못가서 의병들에게 살해 될 정도였다 한다. 의병 활동은 육지는 물론 해상까지 장악해 목포의 일본인상인조합에서 의병토벌을 수 차례 본국에 요청 일제는 '전라도 대토벌작전' 계획을 수립해 1909년 9월1일부터 10월25일 까지 3기로 나눠 보병 2260명에 함정 2척을 동원 해안선을 봉쇄 후 무지막지한 '회오리 작전'으로 전라도를 4개로 분할해 샅샅이 수색하고 민가를 불태우며 전라도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전라도 의병들은 덕룡산 부근으로 모여들어 국사봉.채일봉.진터골.분토.내산.반치 등 거점을 이동하며 투쟁을 계속했다. 해발 614미터의 국사봉은 사방이 트인 천연요쇄의 지리적 환경을 이용하여 호남의병의 사령부 구실을 했다. 호남의소는 국사봉의 한 자락인 내산의 차일봉 인근에 본진을 설치하고 부대를 대치.대항봉.월임치.병암치에 분산 배치하여 부대간 횃불과 깃발 등 신호를 사용하여 상호간 연계 했으며 이 부대들은 보급투쟁과 전투도 자발적으로 전개했다. 의병의 조직체계는 작전 참모격인 모사장과 전투부대인 선봉장.중군장.후군장에 식사를 담당한 호군장. 보급담당의 군량장. 병기 관리의 기군장을 둔 전통적 군대 체제에 동학군의 군편제를 가미했다.
'호남의소강령'도 제정해 배신.양민약탈.강간 등 중죄를 범했을 경우는 즉결 처분하여 기강을 확립했으며 호남의소 명의로 격문과 공문을 발송, 보급투쟁과 모병활동도 독려했다. 호남의소의 조직은 7년 년하 의형제로 영원한 선봉장 강무경에 중군장 안찬재.박사화.박평남 후군장 노병우.나성화.최우평.김성재. 도통장 김도숙 등 30여명이 넘었다. 첫 접전은 3월 7일 강진 옴천면 오치동에서 있었다. 적병 백여 명을 맞아 아침 6시부터 밤 10시경까지 교전 끝에 수십 명을 살상하고 무기를 다수 노획하여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어서 4월 15일 장흥 곽암에서 적 3명을 사살하고, 6월 19일 남평 장담원전투에서 5명을 베고, 6월 25일 능주 노구두전투에서 5명을 베고 말 2필과 무기를 노획하였다. 7월 30일 영암 사촌전투에서 10여 명을 죽이고, 8월 1일 금정 반치에서, 9월 20일 장흥 신풍에서, 10월 9일 해남 성내에서,10월 27일 능주 돌정에서 왜놈과 보조원 백여 명을 살상하였다. 이처럼 30차례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올렸으나 대장 심남일과 선봉장 강무경이 병석에 눕게 되었다. 추위와 굶주림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발병한 것이다. 1909년 3월 장군과 강무경은 병석을 털고 일어나 능주.남평.영암으로부터 내습해 온 적병과 접전해 남평 거성동 전투에서 왜경 70여 명을 사로잡고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적의 내침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능주 풍치의 좌우에 잠복해 있는데 적병 4백여 명의 포위 공격속에서도 용감히 싸워 백여 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에서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용맹에 동요가 백성들의 입을 타고 유행했다. “남일이 용마를 타고 산밖으로 솟아오르면 현수는 풍운을 조화하여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호남의 의병들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왜놈들을 무찌르고 있는데 청천벽력의 '의병을 해산하라.'는 순종황제의 조칙이 내려졌다. 협박에 못 이겨 내려진 조칙인 줄 뻔히 알면서도 1909년 7월 21일 금정면 청룡리 고인동에서 자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장군은
“쓸쓸히 장수랑 군사들은 눈물로 이별 짓고 인산을 떠남에 말조차 더디구나.
왜적을 없앨 날이 언젠가 있으리니
지난 3년 맹서한 일 부디 잊지 마세.”라는 시를 남기고 피 눈물로 의병을 해산한 후 1909년 7윌 장성 동치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강무경 부부와 함께 능주로 잠행하여 이전의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에서 신병 치료 중 10월 9일 부인 임사오와 강무경 장군과 그의 아내 최초의 여성의병 양매방와 함께 왜놈들에게 체포되어 광주로 이송된 후 12월 15일에 대구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투옥중 ’10월 20일 광주 담판’과 ’12월 15일 담판’, 그리고 ‘대구 담판’ 등 대한남아의 기개를 보여줘 왜놈들을 기겁케 했다.
“제 나라를 위한 것도 죄가 될진대 남의 나라를 빼앗은 것은 무슨 죄에 해당하느냐 대장부가 비록 너희에게 사로잡혔지만 쥐같은 네놈들과는 옳다 그르다 따지고 싶지 않다.”고 항변해 왜놈들에게 맞섰다.
“해같이 밝고 달같이 밝던 이 강산,
홀연히 성진에 덮여 앞길 캄캄한데
미처 맑은 날 맞이 못한 채 지하로 돌아가니 멍든 피 푸르러 천년은 가리.”
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1910년 7월23일 39세에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나라에서는 장군의 의병항쟁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저자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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