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호남인맥과 영암

기고
조선 중기의 호남인맥과 영암
- 심심풀이 우리역사
  • 입력 : 2021. 01.15(금) 12:40
  • 영암일보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조선은 이른바 선비의 나라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세상이 조용할 때는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 벼슬살이로 권세와 부를 축적하다가 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미련 없이 낙향해 정자를 짓고 축적해둔 부를 기반으로 학문에 몰두하거나 서원을 출입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사문학을 탄생한 담양의 환벽당, 소쇄원, 면앙정이요. 그 중심에는 광산 김씨 사촌 김윤제가 있었다. 무등산 기슭의 환벽당에 기거했던 김윤제는 광주목사를 지낸 후 대윤과 소윤이 권력다툼으로 시절이 하수상하자 과감히 은퇴하여 송순, 임억령, 김인후, 양산보, 양응정, 기대승, 고경명, 백광훈 등 당시 호남문단의 주류들과 풍류객들의 시사회 모임을 가졌고, 모임처였던 환벽당은 요즘으로 치면 카페의 구실을 했다.

환벽당 [사진=광주광역시북구]

이들은 동문수학시절 사제지간 혹은 소과 합격 후의 성균관 선후배지간의 학연이나 혼인을 통한 혈연으로 인연이 끈끈했고,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거쳤기에 거의 동지적 동반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정암 조광조와 학포 양팽손은 문과합격의 동기에 성균관 학동시절 절친이었다. 영호남 출신지역과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의 본보기다. 훗날 정암의 시신을 거둔 이가 학포다. 양산보는 조광조의 수제자다. 횐벽당 방장격인 김윤제는 양산보의 처남이요. 양산보의 아들 양자징은 김인후의 제자에 사위였고 고경명과는 절친이었다. 면앙정 송순은 양산보의 고숙이었고 김윤제의 조카가 김성원이요. 김성원의 장인이 임억령이요. 임억령의 친동생이 임구령으로 우리 영암출신 고죽 최경창의 장인이다. 최경창의 스승은 학포의 아들 양응정이다. 이율곡을 대과에서 장원으로 발탁한 사람이 양응정이였기에 훗날 기호학파가 태동한 것이다.

또한 고경명의 처가 김윤제의 종생질녀에, 양산보의 사종매가 임억령과 결혼했고, 기축옥사때 우의정으로 추관이었던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 사위다. 문제는 정철이 주도한, 호남선비 1000여명을 앗아간 기축옥사 때 우리 영암 출신들이 큰 화를 당하지 않은 그 이면에는 이처럼 혈연과 학연으로 얽히고설킨 데다 동인의 거두 허봉과 영의정 이산해를 냉엄히 외면한 채 기축옥사의 추관이었던 송강 정철에게 ‘인생 그렇게 사는게 아니라’는 내용의 시 10편을 영암의 대쪽같은 선비 고죽 최경창이 지어보냈었기에 그나마 살아 남았으리라 추정된다.


반면에 사소한 개인 감정¹⁾으로 출발한 광산 이씨 이발 형제에 대한 정철의 원한으로 이발과 학연, 혈연관계를 맺었던 해남 윤씨. 무안 정씨들은 큰 화를 입었고, 이발의 광산 이씨와 정철의 연일 정씨들은 지금까지도 혼인을 꺼려하며, 특히 광산 이씨들은 정철을 3철(악철, 도철, 간철)이라 저주한다는 야사도 전한다.

1) 편집자 주 : 이발이 여덟 살 나던 해 나이 열여섯 살의 정철은 남평에 살던 이발의 집을 들렀다 한다. 여덟 살의 이발과 다섯 살의 그의 동생 이길이 장기를 두는데 이를 구경하던 정철이 훈수를 했다. 이발이 일어나 네놈이 누구이길래 우리 형제장기에 끼어드느냐면서 턱에 숭숭 자라난 수염을 뽑아 던졌다. 정철은 이런 낭패를 당하고도 씩 웃으면서 대문을 걸어 나갔다. 이 얘기를 들은 이발의 어머니 해남 윤씨는 “화를 내지 않고 웃고 나갔다니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므로 조심하라”고 두 아들을 타일렀다. 이후 정철은 1562년 대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고 이발은 11년 늦은 1573년 알성 장원급제해 이조정랑에 발탁되면서 동서붕당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때 이발은 서인들의 미움을 사 1589년 기축년 정여립 고변사건때 이 사건을 담당한 특별검사격인 위관 정철의 손에 걸려들어 장살을 당했다고 한다.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