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를 닦으며

내 얼굴의 상처- 2부

영암일보 yailbo@daum.net
2026년 07월 24일(금) 10:21
<사진=박석구 문인>
오늘 한 시인의 시집과 홈쇼핑 회사 쇼핑 북이 우편물로 도착했다. 마루에 앉아 겨울옷을 고르려고 쇼핑 북을 먼저 펼치다가 봉투를 뜯기만 하고 내버려 둔 시집을 바라보니 가슴이 뜨끔해졌다. 치열하게 쏟아내어 보내준 그의 마음을 외면한 것 같아서였을까. 가지 위에 앉아서 붉은 새 한 마리 검은 둥지를 바라보고 있는 표지화를 보면서, 그의 삶이 붉은 새처럼 한 곳만 바라보고 왔다는 생각에, 평생 조급한 마음으로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초라한 행적만 남기고 귀향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마루를 낡은 수건을 겹쳐서 만든 걸레로 닦는다. 송판을 차곡차곡 이어서 만든 마루는 가끔 옹이도 보이기도 하고 결 무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짙은 갈색으로 변해 세월을 느끼게 한다.
그동안 게을러 닦지 않아서인지 매일 석양빛 한 조각들로 쌓였던 먼지들이 빈 거처였던 건넌방 문틈에 끼어 쥐 오줌, 쥐 터럭과 섞여 웅크리고 있다. 부엌으로 통하는 문 옆의 마루 판자는 옹이가 빠져 있어 들여다보니 명태눈깔이 허옇게 말라 나를 바라본다. 틈새를 채우고 있는 모습이 내 배꼽처럼 보인다. 그것들을 긁어내고 파내고 닦으면서 나무에 새겨진 무늬들이 어느 해 추웠을 때 가늘어지고, 어느 해 가지를 내밀고 옹이가 되어 아팠을 때, 가장 아름다운 파문으로 새겨졌음을 본다.
그 아픔들을 몸속으로 삼키고 마루가 되고 나서야 드러낸,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의 상처를 보면서 내 삶과 비교해 본다. 아, 나도 너처럼 아프게 살아왔지 않느냐. 이 마루의 생과 내 생이 마주치자 바람이 불어온다. 저기 보이는 마른 풀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낸다.
우리 집 마루를 좋아했던 여인이 있었다. 광주 근교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인 그녀는 처음 우리 집을 찾아왔을 때 나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마루에 드러누웠다. 왜냐고 묻자 이렇게 넓은 마루에 드러누워 보는 게 소원이었단다. 어릴 적 자기 집 마루는 단칸방과 고방 밖에 없는 조그만 집이어서 방으로 들어가는 마루가 손바닥만 했다나. 그리고 걸레를 찾더니 샘가에 가 물을 적셔 마루에 오르더니 걸레질을 해댔다. 그것도 마루의 나뭇결이 선명해질 때까지. 그녀의 그 모습이 아름답고 신성하게 보여서 그날 점심을 읍내에 있는 비싼음식점에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는 가끔 우리 집에 와서 그 예식을 몇 번 치르고는 만족한 웃음을 띄웠다. 그러기를 몇 번,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이제 못 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허리가 잘 펴지지 않는다며 울먹였다. 나는 허리에 좋다는 약을 사서 그녀를 찾아갔다.
월출산에서 급히 내려온 바람이 노래진 감나무 잎을 마당에 마구 흩뿌리고 있다. 예전에 우물이 있던 자리는 어젯밤 내린 강서리에 고개 숙인 봉숭아 줄기들이 빈 그늘에 바스락거리며 내년 봄을 꿈꾸고 있다.
마루에서 쳐다보는 처마 안쪽에는 빈 제비집이 네 개나 있다. 이제 제비집을 하나씩 떼어내어야 하지만, 하나는 남겨두어야 내년에 오는 제비가 깃들 것이다. 어느 것을 남겨두어야 하나.
마루에서 바라보는 지는 해는 오늘은 유난히 빨갛다. 오늘 하루, 내 집에서 지저귀던 동박새, 까치, 참새들도 지는 해를 배경 삼아 어디론가 날아간다. 무화과잎도 어제 하루, 속절없이 뚝뚝 떨어지고 긴 가지만 시린 햇빛을 맞고 있다.
며칠 전, 친했던 친구와 다른 친했던 친구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어제는 외사촌 형님의 부음. 나도 이제 서서히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아프기 전까지는 내 뜰을 사랑해야지.
나보다 몇 살 위인 최백호란 가수의 노래가 생각난다.

잘 가라 나를 떠나가는 것들
그것은 젊음 자유 사랑 같은 것들
잘 가라 나를 지켜주던 것들
그것은 열정 방황 순수 같은 것들


- 책 <늙은 시인들의 동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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