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이야기

칼럼
방랑시인 김삿갓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3.03(목) 10:12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지금으로부터 아스라한 70여 년 전, 라디오 방송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드라마는 kbs 방송국의 '김삿갓 북한 방랑기'였다. 1964년 5월에 첫 방송을 시작, 11000회를 기록한 그 당시에는 가장 인기 높은 장수 프로였다.

주인공은 물론 김삿갓이었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북한 주민들의 실상을 파헤치는 코믹과 해학을 담은 흥미진진한 드라마였다.

방랑 시인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풍자 시인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한 방랑 시인으로 곳곳마다 풍류와 일화를 남겼다. '삿갓 립'(笠) 자를 써 김립(金笠)이라고도 불렸다. 본관은 안동 김씨로, 그의 선대 조상을 살펴보면 9대 조부는 병자호란 때 주전파 척화 대신으로 삼전도비 비문을 찢어버린, 그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 형으로서 형조참판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는 황해도 병마절도사 김시태, 고조부는 전의 현감 김관행. 증조부는 경원부사 김이환. 조부는 선천부사 김익순이다.

1807년 순조 때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 가문인 김안근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그의 조부 선천부사 김익순은 반란군의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다. 재수가 없었던지 김익순은 함흥 중군으로 전관되어 온 지 불과 서너 달이 지난 상태였는데 신임지에 와서 어수선한 업무를 파악한 후 전시 중에도 시골의 잔반들을 모아 수 일간 잔치를 열었는데 새벽에 홍경래 반란군이 쳐들어와 술에 취해 잠자고 있던 선천부사 겸 방어 사인 김익순을 반란군이 생포해 결박하고 협박으로 비겁하게 항복을 한 후 이 사실을 은폐하려다 발각이 되고 말았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고 역모죄를 지은 그 가족들만은 살려주기로 하였고 김삿갓도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가문의 노복이었던 김성수의 고향인 황해도 곡산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김삿갓의 아버지는 도중에 화병으로 사망하였고 함평 이 씨인 어머니는 살아남은 4형제를 어렵게 키워냈다. 그중 차남인 김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강원도 영월 도호부에서 열린 향시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장원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에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해 1등으로 급제를 해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어 이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때까지 김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역적으로 몰린 부끄러운 사실을 아들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온 어머니 이 씨 때문이었다. 또한 아들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이 찍히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었다. 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 익순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결국 영월 백일장 때 시제에 김익순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그가 자신의 가족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를 싸잡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어머니의 해명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욕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갈등 끝에 삿갓을 쓰고 방랑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의 조부 김익순이 반란군 세력에 투항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으로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방랑 중이던 29세 때는 가련이라는 기녀와 한때는 동거도 하였다. 방랑 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했다. 어머니와 22살에 결혼한 아내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에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연락을 끊은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김삿갓은 22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절 취하지 않았다. 한때 그의 아들 김익균을 만나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방랑 생활을 계속했다.

김삿갓의 가족 관계는 부인은 장수 황 씨와의 사이에 장남 김학균을 두었는데 형 김병하에게 양자로 출계시켰고 차남 김익균과 삼남 김영규를 두었다. 삼남 김영규는 집안이 복권되자 전라 우후의 벼슬을 지냈으며 손자 김영진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석문사를 창건했다. 김삿갓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야말로 백두산을 제외한 조선팔도 이곳저곳을 누볐으며, 때로는 한곳에 머물며 훈장 노릇을 하여 후학을 기르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높은 문장으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악덕과 부정부패, 조선 사회에 존재하던 폐해 따위를 비판하여 듣는 이의 동조를 이끌어내었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노래로 풀어냈다.

그가 남긴 시 몇 편을 소개하면,'

누가 산속의 바위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은 쉬지 않고 돌아도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 가는 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해 질 녘 이집 저집 문을 두드리니 주인들은 손을 내두르며 나그네를 물리치는구나

두견새도 야박한 인심을 알고 있는지 수풀을 사이에 두고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우는구나'

'비를 만나 시골집에서 자다 굽은 나무 서까래 처마 밑에는 먼지만 쌓였는데 방은 어찌나 좁은지 몸을 겨우 움직이네 평생 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고 하지 않았는데 오늘 밤엔 다리 하나 펴기도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들어오는 연기에 방안은 칠흑같이 어둡고 봉창은 띠로 덥혀서 새벽 온 줄도 모르겠네. 그러나 의관이 이슬에 젖는 걸 면했으니 떠날 때는 가만히 주인에게 고맙다고 하리라,'

김삿갓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즐기며 아름다운 풍경이나 어려운 사람들의 인생사를 시로 엮으며 방방곡곡을 두루 섭렵하다가 1841년 35세 때 전라도로 내려와 광주에서 무등산 장불재를 넘어 화순 적벽을 처음 찾았다. 적벽의 아름다운 산천을 잊지 못하고 이후 1850년 두 번째로 화순을 찾아 구암마을 다산 정약용의 친형인 정약전의 후손인 압해 정씨 정치업의 사랑채에 머물며 많은 시를 남겼으며, 마지막으로 1857년 화순 적벽을 찾은 김삿갓은 1863년 57세 숨을 거둘 때까지 동복면 구암리 정치업의 사랑채에서 머물다 생을 마감한 후 마을 뒷산에 3년간 묻혔다가 강원도 영월로 후손이 이장해 갔다 한다. 인심 좋은 전라도 화순에서 살아서 13년, 죽은 후 3년까지 무려 16년을 화순의 적벽에서 지냈던 것이다.

김삿갓! 할아버지의 죄과를 씻으려고 처절한 자기반성과 회한의 그 심경을 후세에 사는 우리들이 본받고 기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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