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김정호 이야기

칼럼
고산자 김정호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3.11(금) 10:03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고산자 김정호의 본관은 청도요. 자는 백원이다. 황해도 출생으로 어려서 서울로 이사하였고,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의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에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그 후 ‘청구도’로는 만족지 못해 전국을 답사하여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여지승람의 잘못 기록된 부분을 정정하고 보충하기 위해 32권 15책으로 된 대동지지를 집필했다. 전국 각 지방의 연혁. 산수. 인물. 지리를 기록한 책으로서, 조선의 지형과 당시의 각 지방의 풍속까지 꼼꼼히 기록했다. 조선 백성은 누구나 "지도 한 장씩 가슴에 품고 안전하게 길을 가야 한다."라는 그의 실학정신을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그의 호 '고산자, '외로운 옛 산 사나이' 가 의미하는 것처럼 그야말로 혼자서 일찍이 조선의 지도 제작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친 조선 후기의 진정한 실학자이며 지리학자에 목판에 능한 출판가다. 1804년에 황해도 토산에서 태어나 1866년에 사망했다고 하나 그가 언제 태어나 어느 때 사망하였는지조차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흥선대원군에게 대동여지도를 바치고 국가기밀누설죄로 몰려 옥사했다는 설도 있으나 일제가 대원군 이하응을 모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산자가 왕성한 활동을 한 시기는 조선 말 철종조다. 동네 사람이 나무하러 산에 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 걸 목격하고 어려서부터 지도를 그리기로 결심했단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지도의 제작을 위하여 백두산을 8차례 올랐고 조선 팔도를 3번이나 답사하여 세계 그 어떤 지도보다도 실제의 지형. 산. 강. 도로의 모양과 2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정확도가 뛰어나 일본의 지리학자들도 경탄했다고 한다.

김정호는 나라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은 채 '만국 일통론'을 주장한 기학의 전문 가요. 개성 부자였던 친구 최한기와 최성환, 정약용. 김정희의 제자였던 좌찬성 신헌의 도움만으로 어린 딸과 함께 지도를 손수 제작하였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고산자를 도왔던 최한기는 개화파로 연결되고 신헌은 '강화도 수호조약' 체결의 책임관으로 둘 다 실학자들이기에 고산자에게 재정적 후원을 했던 것이다.

22첩의 방대한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전 사전 준비 작업으로 '여도비지', '동여도'와 '청구도'를 만들었기에 그처럼 완벽한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의 차이점은 청구도는 책으로 되어있고 대동여지도는 세로 6.7m에 가로 4.3m 크기의 첩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평생을 가진 것 없이 날품을 팔아 돈이 생기면 지도 만드는 일에만 몰두한 그의 삶과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딸 하나 있는 거 시집도 못 보내고 평생을 아비의 지도 제작을 돕다가 죽었단다. 지아비로서의 구실도 변변치 못해 아내의 그 구박도 가히 짐작이 간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일관되게 주장하며 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에게 나라에서 벼슬과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병인양요 등 시대적 혼란의 상황으로 다른 나라에 팔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다고 오해하여 억울한 누명을 씌워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시킨 당시 안목 없는 군왕과 집권자들의 무지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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