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토착 성씨들 이야기

칼럼
영암의 토착 성씨들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4.15(금) 11:24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위원

‘천성만본’이라는 말 따라 현재 우리나라는 280개 성과 본관에 따른 5582개의 씨가 있다. 외국인들의 귀화와 성씨 개명 완화로 날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성씨의 역사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 후 호족들에게 성을 하사한, '토성분정'으로 성씨가 늘어났지만 극소수였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양반이 아니면 성씨를 가질 수 없었다. 왕실은 '선원록'과 '유부록'을, 가문에서는 '족보'를 만들어 성씨를 엄격히 관리했다.

1894년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고 1909년 3월 세수확대와 군인징발을 목적으로 조선통감부가 '민적정리령'을 강제 시행, 분주소에서 민적등록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금을 물리고 거부한 자는 곤장 10대를 쳐 강행했다. 노비나 상민 등 천민계급도 주인 성씨로 등재했다.

성씨는 임금이 귀화인과 공신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출생 지명을 따라 이름을 붙였다. 조선 초기까지 왕족과 권문세가에 국한되었고 고구려는, 해.을.예.손.목.우.주.마.찬.동.연.을지 등 ​성씨가 10개였고 백제는 여.사.연.협.해.진.국.목 의 ​8개 성씨가 존재했으며 ​신라는 6부 촌장 이.최.정.손.배.설씨에다 ​김.박.설의 왕족 성씨가 있었다.

​이씨조선에서는 '음양오행상 금이 목을 해친다.'고 금을 김이라 억지로 고쳤으며 고려시대에 잘 나갔던 김해김씨나 경주이씨는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를 추종했다며 불랙리스트가 되어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

영암에 사는 성씨들 중 토착 성씨라고 불리는 몇 성씨를 살펴보자.

김해김씨는 1970년대는 8,100명으로 영암인구의 13.4%를 차지했으며 학산.서호.영암.신북.금정 등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삼현파.사군파.경파.시종공파.도사공파 등 여러파가 살았고 문관보다는 무관을 배출했다. 대표적 인물로 학성군 김완 장군을 꼽을 수 있다. 무과에 급제한 용장으로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괄의 난을 평정해 공신에다 학성군에 봉해졌다.

선친 김극조도 무과 입격 후 광양현감을 지냈으며 학천군에 추봉되었고 백부 김극희도 무과에 입격해 이순신의 막료로 한산도 전투에서 아들인 선전관 김함과 선봉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김완의 아들 김여수는 무과에 장원급제해 도총관을 지내고 해성군이 되었고 손자 김세기도 무과에 입격 후 함경도병사를 지냈으며 학림군에 봉해졌다. 김완의 조카 김여준도 소현세자 등이 인질로 심양에 갈 때 같이 간 18장사 중의 한 명으로 월명비안(月明飛雁)의 유명한 시를 읊은 충직한 장수였다.

 다음은 경주이씨를 살펴보자. 경주이씨의 시조는 사로 6촌의 화백회의를 주재했던 알평이다. 유리왕 때 이씨를 하사받았고 대표적 인물은 고려 충선왕 때 만권당의 대표 학자였던 익재 이제현이다. 익제는 고려 말에 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예문관.춘추관의 고위 관직을 지내고 이색 등 수많은 제자를 길러 그의 학맥을 이은 제자들이 신진사대부로 개혁에 앞장섰고 조선의 사림파를 형성했다.

11세 후손 이인걸은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로 행주 대첩에서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이인걸의 손자 이주남도 영암에 망호정을 짓고 강학소를 열어 후학을 양성했다. 집성촌 망호리는 참빗을 만들어 나라에 진상했다.

창녕조씨는 신라 선덕여왕과 결혼한 조계롱을 시조로 경상도 창녕이 세거지다. 고려시대에는 8대에 걸쳐 문하평장사를 배출하였다. 조선 최고의 석학 남명 조식이 창녕조씨의 대표적 인물이다. 조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으며, 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사양한 채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고 제자들에게 무예도 연마시켜 홍의장군 곽재우.정인홍 등 제자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해 나라를 구했다.

영암의 창녕조씨들은 주로 영암읍을 비롯하여 군서.시종. 미암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중시조인 남은 조세풍은 경상도에서 살았으나 당시 이율곡의 10만 양병설에 깊이 깨달아 1580년 고향을 버리고 영암으로 와서 강당을 짓고 강진.해남의 선비 수백 명을 규합하여 1592년 4월 왜란이 일어나자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제자들과 함께 군수물자 보급책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다.

영암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 영암지방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조극환과 미스트롯의 가수 송가인도 창녕 조씨다.

경주 배씨는 신라의 성씨다. 경주 배씨의 관향은 경상도 경주이고 시조는 배현경이다. 태봉국 궁예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신숭겸, 복지겸과 더불어 궁예를 몰아내고, 태조 왕건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올랐다. 후손 배극렴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옥쇄를 건네준 인물이었고 영암지방에 배씨들이 세거한 연유는 삼별초의 최후 지휘자 배중손의 진도 용장산성의 대몽항쟁과도 연계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왜구의 약탈이 워낙 심해 공도정책으로 진도군민을 시종면에 이주시킨 기록도 보인다. 문과 합격자 보다 무과 합격자를 많이 배출된 무인 집안이다.

하씨도 영암의 토반이다. 진양하씨의 시조는 하공진으로 진주가 세거지요. 대표적 인물 하륜은 뛰어난 두뇌와 관상으로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과거시험장에서 인생을 바꿔줄 인물을 만났는데 고려의 충신 도은 이색이었다. 이색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는데 지공거가 되어 하륜과 좌주문생의 인연을 맺은 후 가르침을 주었다. 하륜은 권신 이인임의 조카사위였으나 처세술이 뛰어나 이방원의 책사에 킹메이커가 되었다. 방원의 관상을 보고 장인 민제에게 접근해 주군 관계를 맺었다. 하위지는 문과 장원급제자로 단종 복위운동 주모자인 사육신으로 세조에게 할 말을 제대로 한 대쪽 선비였다. 후손으로 영암아리랑을 부른 가수 하춘화도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 류씨다. 시조는 류차달로 왕건을 도와 삼한공신이 되어 류씨를 번성케 했다.

문화류씨의 대표 인물은 하정 류관을 꼽을 수 있다. 류관은 청백리의 대명사로 영의정 자리를 탐하지 않은채 4년 동안 우의정으로서, 손자같은 어린 세종을 모시며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조선의 기틀을 세운 상신이다. 정1품 정승이 초가 삼간에서 비가 새면 우산을 받쳐 들고 우산없는 집을 오히려 걱정하는 여유와 위트도 남겼다. 또한 말썽 많은 기복조치를 취지에 맞게 시행 했다. ​기복(起復)이란 신하가 부모상을 당해 시묘살이 중 상복을 벗고 등청하는 제도다. 당시 관리들이 상을 당하면 3년상은커녕 채 100일도 채우지 않고 상복을 벗고 관직으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류관은 3년탈복의 상례를 주장하면서 나라의 중대사와 관계되지 않은 관리들은 반드시 3년상을 채워야 한다고 주청해 관철시킨 인물이다. ​형조판서 재직 때는 “형벌 맡은 관리들이 백성들의 생명의 돌보지 않고 함부로 매질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희생이 늘어나고 있다. 함부로 고문할 수 없게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청해 관철시켰다.

위에 열거한, 성씨들은 순수한 토성의 성씨들로 조선 시대 대부분 비주류들로 당색은 동인이나 남인 또는 소론의 계열로 서로간 학맥.혼맥으로 엉켜져 활발히 교류했으며 물질보다는 명예를 더 귀하게 여겼던 영암의 토반들이었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