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숨겨진 민족영웅! 황진 장군 이야기

칼럼
임진왜란의 숨겨진 민족영웅! 황진 장군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4.22(금) 13:54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주간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황진!”

지금부터 430년 전, 조선 백성들이 외쳤던 연호다. 1592년 7월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전라도가 왜적들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주인공이 황진 장군이다.

장군은 1550년(명종 5)에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호는 아술당.세종조의 청백리 황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황윤공이다. 1572년(선조 5) 약관 22세에 무과 병과 16위로 급제한 뒤, 안원보권관, 거산도찰방, 선전관을 거쳤다.

1592년 화순 동복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치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후 1593년 7월 진주성 2차 전투까지 선봉장으로만 활약하다 사라진 조선 최고의 용장이라 할 수 있다.

이치는 전라북도 금산군 진산면에 있다. 1592년(선조 25) 7월 초 고바야카와끼 휘하 왜군이 이치를 거쳐 전주로 향하려고 했다. 광주목사 권율은 광주부근에서 모은 의병과 관군 1,500명을 거느리고 이치에 진을 쳤다.

드디어 7월 8일 이른 아침부터 왜군이 공격해오자, 권율과 황진은 맞서 싸웠다. 활로 많은 적들을 죽이다가 조총을 맞아 다리와 이마의 총상을 견디며 용감히 싸운끝에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조선군의 큰 승리로 끝났으며, 왜군은 이 전투를 조선 3대 패전의 하나로 꼽았다. 이 전투 승리로 전라도는 후방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왜군들은 이치전투에서 패배함으로 호남 진출을 포기했고, 이순신 장군이 후방을 압박하여, 수륙병진 작전을 수행하려던 왜군의 기도가 실패했다.

'장군은 장대한 체격에 아름다운 수염을 지니어 모습이 매우 기위하였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으며, 강건하고 민첩함이 비호와 같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임진란이 발발하기 2년 전, 조선통신사 황윤길이 5촌 당숙으로, 황진은 사신들의 호위 역할로 함께 왜국에 갔다.

방문 후 왜국 무사들은 조선 통신사들의 기를 죽이려 5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워놓고 쏘아 맞췄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황진이 그 과녁 옆에 작은 과녁을 세우고 명중시킨 다음, 남은 화살 두발을 연속으로 쏴 새 두 마리를 떨어뜨려 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귀국이 반년이나 지체되는 동안, 황진은 왜국 형편 및 전쟁 준비 상황을 간파할 수 있었고 조총 사격 훈련, 진법 훈련, 검술 등을 면밀히 살피며 조선을 침범하리라 직감하고 보검 한 쌍도 구했다.

귀국 후 수행 공로로 화순 동복현감에 임명되었다. 부임 후 음주가무를 일체 삼가고 오직 무예연마와 병사들 훈련에 매진하였다.

1592년 4월 13일, 왜의 침략은 현실이 되었다. 부산성 공격을 시작으로, 명장 이일과 신립을 패전시킨채 20일만에 한성을 점령했다. 졸군 선조는 의주까지 줄행랑 쳤고 전라감사 이광은 근왕군 5만명을 모집해 상경하다 용인에서 2천의 왜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황진도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으나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부하 200여명을 데리고 동복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용인전투 때 황진의 장수로서 비범함을 알아본 권율장군은 황진을 불러 전략을 논의했다.

왜군의 무기와 전략을 파악하고 대비해왔던 황진은 100년간 공성전과 수성전을 해온 왜적을 상대로 성이나 평지에서 싸우면 안되고, 산이 많은 조선의 지형적 장점을 최대한 살려 웅치나 이치같은 험한재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 조언했고 권율도 조언에 따랐다.

권율 장군은 웅치와 이치고개에 휘하 병력 2,500명을 나누어 배치하고, 목책과 녹채,함정을 설치하며 날카로운 마름쇠를 뿌리고 투석용 돌을 쌓아놓은 등 전투준비를 했다.

7천명에 달하는 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자, 황진은 부하들과 함께 고지에서 맞서 싸웠고 적이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며 파상공격을 막아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피비린내가 산천을 진동했다.

총탄을 막으며 쏘는 활은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적들은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해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무리지어 뛰어 나오자 우리 군사들이 흩어져 달아나려 하자 권율이 후퇴하는 자들를 참수하니 다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기겁해 병기를 버리고 도망갔다.
큰 부상을 입고도 진두지휘해 승리하고 동복으로 돌아가는데 온 백성들이 나와서 "황진 장군이 아니면 전주가 어찌 무사하였겠습니까."하고 칭찬했다. 

권율은 이치전투의 전공을 인정받아 광주목사에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했다. 황진도 체찰사 송강 정철이 당시 전투 상황을 제대로 보고해 동복현감에서 익산군수겸 전라도 조방장으로 승진했다.

왜란 발발 후 공성전도 아닌, 야전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고바야카와는 금산을 포기하고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 이 전투 후 왜군은 정유재란이 시작될 때까지 다시는 호남을 넘보지 못했다.

전라감사가 된 권율은 1592년 10월, 5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권율은 황진을 선봉장으로 삼고 싶었지만, 이치전투에서 입은 허벅지와 이마의 총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익산에 남아 요양케 했다.

권율이 행주산성 입성을 준비하던 어느 날, 부상에서 회복한 황진은 다시 복귀했다. 전라병사 선거이와 함께 금천의 호암산성에 주둔하며 왜군을 견제하며 정찰업무에 나섰다.

정탐을 하던 도중 매복하고 있던 왜군이 기습공격을 가해오자 장수들은 모두 퇴각했으나 최전방의 황진은 홀로 왜군에게 포위되었다.

황진은 포위망에 갇혀 이틀 동안이나 혼자서 장검으로 좌우의 왜적을 치고 베자 뿜어 나오는 선혈이 장군의 수염을 적셔 고드름처럼 엉겨붙어 이 모습을 본 왜적들은 겁에 질려 도주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황진을 정3품 절충 장군겸 충청도조방장에 임명했다가 다시 충청병마사에 임명했다.

황진의 활약은 입소문을 타고 백성들 사이에 회자되어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을 연호하는 전설적 인물이 되었고 장정들이 몰려 들었다.

평양성전투와 행주성전투의 패배에 군수품 보급 차질, 전염병 등으로 고전을 겪던 왜군은 명나라와 휴전 협상으로 1593년 4월 한양에서 물러나 경상도 해안가로 후퇴했다. 

이에 충청병마사 황진은 자신의 병력 700여 명을 이끌고 관할 지역을 넘어 경상도까지 내려가 싸움을 자청했다.

1592년 10월 진주성 1차 전투의 패배를 분통해하던 풍신수길은 1차 전투를 설욕하고 명과의 강화협상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 출병의 모든 장수들에게 진주성 총공격을 명했다. 살아있는 생명은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이고 전라도를 점령할 것을 엄명했다. 30만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명군은 진주성 철수를 권유했다.

1593년 6월 상주에서 황진은 창의사 김천일을 만나, 진주성을 지키기로 굳게 결의를 하고 휘하 병력 700명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고 몰려온 백성의 수가 3만을 넘어 6만명에 이르렀다. 

황진도 전세를 가늠했지만 백성들을 결코 버릴수는 없었다. 전라감사 권율, 전라병사 선거이 등 지휘부와 홍의장군 곽재우 까지도 수성을 포기했다. 성안에 남은 병력은 겨우 6천명에 불과했다.

의병장 곽재우는 “충청 병사 황진은 진주성 수비와 직접 관계가 없으니 밖에서 싸우는 것이 옳겠다.”하며 극력히 만류했으나 “나는 이미 창의사 김시민과 더불어 공약을 하였으니 저버릴 수 없다.”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1593년 7월 20일, 조선군 6000명은 왜군 97000명과 치열한 교전이 시작되었고 선봉장 황진의 분투로 사기가 충천해 예상과는 달리 진주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장군은 손가락을 천으로 굳게 동여매고 활시위를 당겼다. 천 조각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7월 26일 용장 황진 장군은 왜적의 총탄을 맞아 한창 나이인 44세에 장렬히 전사했다.

자기 자신의 출세를 버린채 오직 백성들의 안위와 의리를 추구하다 아름답게 산화한 것이다.

[약력]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