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권력층들의 부동산 쟁탈 이야기

칼럼
조선왕조 권력층들의 부동산 쟁탈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5.12(목) 15:24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위원

서기 1392년 음력 7월 17일,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오른다. 한 달 뒤엔 민심 수습 차원으로 한양(漢陽)으로 천도를 선언했다.

1393년 2월 15일, 명나라로 떠났던 사신 한상질이 귀국하여 명나라 조정의 국호 승인에 대한 고명을 이성계에게 바쳤다. “국호는 조선(朝鮮)으로 하라”라는 비답이었다.

황제국에서 국명을 받은 이성계는 고려권지국사에서 왕의 칭호를 받게 된 기쁨으로 사신으로 갔던, 훗날 계유정난의 칠삭동이 한명회의 조부 한상질에게 토지 50결을 하사했다. 요즘으로 치면 15만 평의 토지를 내린 것이다.

1395년 6월 6일, 조선 조정은 새 서울의 이름을 남경에서 ‘한성(漢城)’으로 명명했다. 개경에 살던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이 무리 지어 설렘 속에 새 수도인 한성으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의 한성은 지금의 서울의 개념과 달랐다. 많은 백성들이 모여 살기엔 턱없이 비좁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로 옮기고 이름도 양주군으로 개명을 했다. 무지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래도 한성은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 터가 지나치게 좁은 탓이었다.

집 문제를 둘러싸고 해괴한 일들도 자주 벌어졌다. 고위직 벼슬아치들이 힘없는 백성들이나 자기보다 지체가 낮은 벼슬아치들의 여염집을 강제로 뺏거나 싼 가격으로 억지 매입하는 이른바 ‘여가탈입(閭家奪入)’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한 뒤 조선 조정은 전,현직 관리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집터를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는 정1품 벼슬아치들에게는 60부(負)를 주었으나 주무 부처인 호조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도성의 면적은 5백여 결에 불과한데, 60부를 주게 되면 현임 관료도 줄 수 없거늘, 어찌 서민에게까지 땅이 돌아가겠습니까?”

그리하여 정1품은 35부로 시작해 6품은 10부, 나머지 서민은 2부씩 집터를 분배토록 했다. 1부(負)는 ‘곡식 한 짐을 추수할 수 있는 면적’이다. 세종 26년에 만든 등전척에 따르면 100부가 1결이니, 1부는 가로.세로 10척인 셈이다.

그러나 땅 싸움은 끝이 없었다. 나라에 큰 행사가 있거나 문무과 과거시험 때는 엄청난 수험생이 한성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청개천가에 움막을 짓고 있는 천민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에 응시생들로 인한 민폐가 극심했다.

종2품 판개성부사 이거인이 정4품 이조의랑 최사위가 받은 땅을 빼앗으려다 미수에 그치자 검교중추원부사 최융의 집을 빼앗아버린 사건 등 크고 작은 불법행위가 도처에서 발생했다. 이에 간관 장지화가 죄를 물어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자 조정에선 “이거인은 공신이니 파면만 허락한다”라며 적당히 넘어갔다. 그래서 남의 집을 빼앗는 사례가 계속 속출했다.

집의 크기와 권세가 비례되어 고관대작들은 집터를 늘리고 규모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이에 세종은 “궁궐처럼 넓은 사대부 집은 온당치 않다. 왕족은 50칸, 대군은 60칸, 2품 이상은 40칸, 이하는 30칸, 서민은 10칸으로 집 면적을 제한하라”라고 명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여기에다 조선의 10대 임금 연산군은 이 여가탈입 현상에 부채질한 장본인이다. 경기도 고양, 김포 일대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왕실의 사냥터로 만들어 버렸다.

경복궁 주변 민가들은 ‘궁궐을 엿볼 수 있다’는 억지 이유를 들어 철거를 명했다. 처음에는 “집 헐리는 사람에게 무명배를 조금씩 나눠줘서 나라의 뜻을 알게 하라”라며 집의 크기에 맞춰 무명 50필부터 10필까지 보상액을 정했다.

백성들이 보상액이 적다고 항의하자 “불쌍해서 은전을 베풀려 했더니 너희가 시끄럽게 구는구나. 얼른 철거해버리면 너희가 무슨 반대를 하겠는가. 급속히 철거하라”라는 교지를 내려 그해 겨울, 강제 철거를 단행했다. 백성들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미치광이였다. 성균관 주변과 동소문 밖 민가 143채가 철거되었고 연산군 재위 기간에 궁궐 주변에서 철거된 집이 무려 990여 채나 되었다.

임금이란 작자가 이쯤 되니 서울의 땅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패악질을 벌인 고관대작들과 양반들은 부지기수였다. 권력을 배경으로 힘없는 여염집을 강탈하는 버릇은 계속되었다. 1535년 명종 때는 2품 벼슬아치 송숙근이 백성의 집을 빼앗다가 적발되었다. 광해군 때는 ‘권력을 가진 사대부들이 백성들의 여염집을 빼앗고 매질까지 하는 일이 많아 백성들이 원통해 한다’라는 상소가 자주 올라오기도 했다.

광해군은 대노하여 “폐습이 고질화됐으니 몹시 한심스럽다”며 엄단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 뿌리를 뽑지는 못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 이후 사회가 안정되고 상업이 부흥된, 17세기 이후 한성의 인구는 급증했다. 따라서 여가탈입 현상도 폭증했다.

조정 관리가 가마를 타고 여장을 한 뒤 상인 집에 돌입해서는 그대로 빼앗아 살고 있는가 하면, 전염병이 돌자 백성들의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 사대부들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병조좌랑 이자는 상인과 역관 집을 차례차례 빼앗아 골라서 살다가 기찰에 걸려 파직되기도 했다.

더구나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해야 할 사헌부 지평 윤경주란 자는 여가탈입죄로 노역형에 처해졌다. 요즘으로 치면 대검찰청 검사가 죄인들의 집을 교묘한 법을 적용해 자기가 차지한 셈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1754년 영조는 남의 집을 강탈한 사대부 20여 명을 적발해 처벌하고 한성 판윤 어유룡도 책임을 물어 파면시켰다. 여가탈입을 저지른 관리는 2년 금고형을 적용했고 일반 사대부는 과거 응시 자격 박탈 6년을 내리라고 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탈입 금지령을 어긴 정승 1명이 또 적발되었다. 그가 바로 영조가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영의정 홍치중이었다. 영조는 대노하여 아예 여가매매를 금지한다고 왕명을 선포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부동산에 대한 욕망은 똑 같았던것 같다.

‘벼슬길에 나갔을 때는 빨리 높직한 산언덕에 셋집을 내어 살고, 벼슬에서 떨어지면 빨리 한성에 의탁해 살 자리를 정하여라. 너희들의 뒷날 계획은 오직 서울 십 리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다.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으로 깊이 들어가 살 수 없다면 모름지기 잠시 근교에 머무르며 과수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재산이 넉넉해지기를 기다려 도심의 중앙으로 들어가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한성의 두 아들 학연.학유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도성에서 몇 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 사회가 되어 있다’라며 생존의 법칙을 명확히 전수했다. 폐족으로 치닫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대단한 선견지명을 가진 부동산 전공의 경제학자들을 능가하는 예지를 가졌던 조선 사대부라 여겨진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