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임금의 리더쉽 이야기

칼럼
조선 정조 임금의 리더쉽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5.18(수) 11:16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주간
조선 왕조 27명 임금 중 22대 정조 이산처럼 성리학의 통치이념을 놓고 신하들과 심하게 논쟁을 한 군왕은 정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사가들은 평가했다. 정조는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었던 세종의 리더십과 비교해 도 극명하게 그 차이를 드러냈다. 

세종 이도는 승하할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호학군주였다. 그러나 세종은 정조와는 달리 성리학의 이론 체계가 신권 우위의 통치이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강한 신하들을 적당히 어루만지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정조는 세종과는 정반대로 ‘만천명월 주인옹’의 모든 권력은 군왕으로부터 나온다는 ‘군주도통론’에 함몰되어 ‘산림도통론’을 고집하는 신하들을 학문과 토론으로 설득시키거나 굴복을 받아 통치했던 아웃사이더였다. 치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막강한 왕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굳은 소신으로 산림도통론을 견지하려는 신권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가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 세종 집권기는 선왕 태종 이방원이 척신들을 사전에 정지작업을 해 신권이 약해 통치가 그런대로 쉬웠으나 정조의 집권기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벽파들이 요직에 포진해 남인과 소론들은 조회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등 노론당 일당독재의 외줄타기 시대였다.

정조가 그 억센 노론들을 제압키 위해서는 ‘군주도통론’만이 유일한 통치기술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노론 세력들의 일치단결된 집단행동으로 인사대권과 군사대권도 즉위초에는 행사하지 못한 채 끊임없는 암살과 음모로 분노 속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정조는 8만 권이 넘는 독서광으로 왕위에 오르자 권철신, 이가환, 정약용, 박제가 등 당대의 석학들과 규장각에서 정책을 입안하며 정책토론의 경연이 주요 일과였다. 오직 실력으로 신하들을 제압해 왕권을 강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토론과 경연이 진전될수록 정조는 그 결과에 흡족해 더욱 군주도통론에 매달렸다. 토론의 상대도 당색에 관계가 없었다. 두주를 불사해 음주로도 신하들을 제압했으며 애연가를 넘어 골초였기에 규장각은 늘 매연에 절여 있었다고 한다.

더욱 특이한 것은 정조의 집권에 자주 비토를 놓으며 정조 암살을 주도했던 정적인 노론벽파의 좌장 우의정 심환지와 밀서를 299통이나 주고받았으며 노론당 청명파의 중심 인물 김종수를 토론에 꼭 참여시켰고 중용했다는 사실이다. ​김종수 역시 정조의 심중을 잘 간파하고 노론 벽파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정치적 라이벌인 남인 채제공과 함께 정조의 충실한 파트너가 되었다. 시셋말로 적과 동침을 자처한 것이다.

정조의 용인술은 적중해 노론의 강경파 일각에서 주도한 역모사건이 잇달아 일어났을 때 김종수는 자기의 가까운 인척의 연루 사실까지도 직접 정조에게 고변을 해 정조를 위기에서 구했다.

김종수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숙종 때의 척신 김석주에 비유하며 군왕인 정조를 비호했다. 그는 혜경궁 홍씨의 6촌으로 혈족의 연계가 있었기에 당론보다는 나라의 안위와 정조의 존재가치를 중시한 정치가였다.

명성왕후 김씨의 외척 김석주는 숙종을 위해 반간계를 구사하는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파를 제거한 척신이었다. 환국정치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겠지만 절대적 군왕의 신임을 유지하고 보호막인 군왕의 안위를 생각해 자기세력들 중 문제가 있는 자를 고변한, 김석주의 처신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비록 노론 골수 벽파로 내심으론 미웠지만 김종수를 끝까지 신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종수는 정조가 추진한 대부분의 개혁에 적극 협조했고 참여했다. 정조의 고도의 정치술로 준탕평책과 외척 배제의 원칙이 대두되었고 규장각이 정책 수립의 최고기관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사도세자의 화성능원 조성도 노론세력의 참여 아래 이뤄졌다. 참으로 놀라운 정조만의 용인술이요, 결단이었다.

노론 김종수의 평생 원수인 남인 세력 채제공은 영조 때부터 사도세자의 문제에 관한 한 노론인 김종수와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남인세력의 대표인 체제공은 사도세자 사후 영조로부터 은밀한 밀명을 받았던 신하였다. 한밤중에 영조는 도승지 체제공과 사저에 있는 세손을 불러들였다. 사초를 기록해야 할 사관마저 내보고 “세자의 죽음은 내가 경솔했던 탓이다. 이 한 통의 문서를 잘 보관해 훗날 세손이 크면 읽어보게 하라”며 도승지 체제공에게 주면서 영조의 첫 왕비였던 정성황후 서 씨 신위의 요 밑에 넣어두게 했다. 

바로 이것이 ‘금등문서’다. 원래 금등은 쇠줄로 단단히 봉해 비밀문서를 넣어주는 상자를 뜻하나, 여기서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뒤 이 사실을 후회하여 기록한 글을 말한다. 이것이 사도세자 사후 30년이 넘어 정조가 노론세력들의 정치적 압박이 극에 도달하자 영의정 채제공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어 노론 세력들을 압박해 정국의 난제들을 풀어나갔다.

정조는 재위 13년에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남쪽의 화산으로 이장하는 것을 계기로 화성을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나 새로운 정치의 전략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13차례나 화성을 방문했다. 여기에는 채제공과 정약용 등 정조의 측근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정조는 재위 17년 정월에 화성을 유수부로 승격했다. 노론일파들의 압박이 거센 가운데 화성유수로 있던 채제공을 불러 영의정에 제수하면서, 김종수를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숙종 이후 남인이 공식적으로 영의정에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채제공은 곧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며 이에 대한 시비를 가를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영조 이래의 금기를 깬 것이다.

노론 벽파들은 사도세자를 죽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까닭에 채제공을 탄핵하고 나섰다. 채제공도 물러서지 않았다. 김종수와 채제공이 정면충돌을 거듭하는 와중에 정조는 양쪽의 책임을 물어 두 사람을 파직시켰다. 채제공이 영의정에 오른 지 열흘 만의 일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채제공에 대한 탄핵이 그치지 않았다. 정조는 마침내 2품 이상의 대신을 소집한 가운데 승지를 시켜 ‘금등문서’에서 직접 베낀 두 구절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지키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바라노라”

‘피 묻은 적삼’과 ‘동’은 사도세자를 지칭한 것으로 ‘적삼’은 영조의 첫 번째 부인인 정성왕후 서 씨가 죽었을 때 사도세자가 피눈물을 흘린 적삼을 ‘동’은 그가 짚던 상장을 뜻했다. 사도세자는 정성황후가 죽자 피눈물을 적삼에 흘릴 정도로 애통했다. 영조가 ‘금등문서’를 남긴 것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회한을 드러낸 것이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묻힌 채 드러나지 못할 뻔했던 것이 지금 그의 상소로 인하여 그 단서가 발로되었으니,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이러쿵 저러쿵 시끄럽게 구는 일이 있으면 모조리 성토할 것이다. 오늘 이후 사리를 천명할 책임은 오로지 경들에게 있다”

‘선왕 영조의 유명’을 구실로 채제공에게 거센 공격을 퍼붓던 노론 세력은 다시는 이 문제를 시비할 명분을 잃어버렸다. 노론 벽파가 화성에 대해 시비를 걸면 정조 자신도 ‘금등문서’로 사도세자 문제를 공론화하겠다는 승부수가 적중한 것이다. 이처럼 정조는 왕권을 강화키 위해서는 적과도 동침하며 때론 금등비서를 활용한 극약처방을 함께 사용하는 강온전략을 병행한 영명한 군주였다.

또한 정조는 몇 차례의 화성 행차길을 통해 억울한 백성들의 격쟁으로 접수된 상언을 무려 1300 건이나 접수, 모두 해결해 준 소통의 군왕이었다.

여소야대의 현 정국에 정조의 정치적 리더쉽을 우리는 새겨야 하겠다.

[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