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적 홍길동과 교산 허균 이야기

칼럼
의적 홍길동과 교산 허균 이야기
  • 입력 : 2022. 06.25(토) 13:27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주간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 때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의적떼 '활빈당'의 우두머리다.

1443년 활쏘기에 능했던, 경성절제사 남양 홍씨 홍상직과 관기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라고 전하나 그 출생기록은 정확하지가 않다. 할아버지는 고려말기 밀직부사 홍징이며, 최영장군에게 숙청된, 권신 염흥방의 매제로 이성계의 막료였다. 길동의 이복형으로는 남평문씨가 낳은 홍귀동·홍일동으로 두 형제가 출세를 했다.

홍길동은 조선 연산군의 패륜과 만행으로 민심이 흉흉한 시절, 신출귀몰한 행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 인물이며, 선조 때 교산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모델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홍길동을 '성호사설'에서 임꺽정·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둑’이라 했다. 핍박 받았던 조선민중들은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힘없는 민중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추앙하며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염원하며 활빈당의 의적행위를 지원했던 것 같다.

홍길동은 1443년(세종 25년)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나, 1510년(중종 5년)에 처형되었다는 설과 그의 꿈이었던 이조판서를 지내고 오끼나와로 건너가 새로운 이상국가인 유구국을 만들었다는 등 이설이 많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홍길동은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좌의정 성준·우의정 이극균이 함께 아뢰기를,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나 그 이후의 기록은 전무하다.

홍길동은 충청도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다.

부패한 사회제도와 사대부 권력에 대한 힘없는 민중들은 홍길동의 대담무쌍한 의적 활동을 통해 대리만족을 즐겼으며 임진왜란의 참화가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조선 광해군대에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사대부들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피기는커녕 치열한 당쟁과 권력다툼 속에서 자신들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했다.

이같은 현실을 직시한 허균은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라고 역설했다. 허균은 '호민론'을 주장하며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恒民), 불만이 쌓인 원민(怨民),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구분한 다음,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살기를 위해 자연히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호민의 대표로 홍길동이란 인물을 띄웠고 허균은 성리학에 입각한 신분제를 건들어 반대당들의 기찰과 음모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허균이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으로 홍길동을 등장시켰다. 오늘날 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홍길동에 대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핍박받는 서민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가 의적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민중들은 부정한 체제,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으로서 치열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홍길동이 활약한, 성종에서 연산군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조선은 '경국대전'을 편찬해 법률체계를 완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았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세조 대부터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훈구파와 성리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체계를 꿈꾸며 출사한 사림파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중앙정부 고관대작들의 정쟁에 편승한 지방의 수령과 이속들이 한통속이 되어 가렴주구를 일삼아 수많은 양민들슨 터전을 잃고 고향을 떠나야 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도적떼로 변신하여 자신들을 핍박했던 양반가나 관청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그때 가장 강성했던 도적떼의 두령이 바로 충청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활빈당의 기치를 내건 홍길동이다.

서거정이 쓴 '필원잡기'에는 길동의 이복형인 홍일동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일동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낸 계유정난 쿠데타에 참여하여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딸은 성종의 후궁인 숙의 홍씨다. 성품이 호탕하고 겉치레를 하지 않은채 문장이 뛰어났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소리를 내며 거구에다 대주가에 대식가였다. 어느날 진관사에서 놀러가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그런데, 산 밑에 이르러 술자리 가 있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막걸리 마흔 잔을 마셨다 한다. 세조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장사라고 탄복했다 한다. 그는 평소에는 미숫가루와 술을 마셨을 뿐 밥은 먹지 않았는데 훗날 홍주에서 폭음한 다음 갑자기 죽었다 한다.

이처럼 대범한 홍일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복동생 홍길동 역시 호탕하고 대비범한 인물이었기에 그 휘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성리학에 절여 든 조선의 강력한 신분제도에 따라 비천한 얼자로써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리와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했던 것이다.

홍길동은 일반 도적들처럼 산 속에 일정한 근거지의 요새를 두지 않고 한양도성과 큰 고을을 활보하면서 간 큰 도적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정부관리와 이속들을 회유하고 포섭해 각종 정보를 취합한 다음 조직적으로 도적질을 일삼았다. 길동은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 차림으로 무기를 소지한 채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들락거렸지만 지방의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의 좌수, 별감 등이 감히 제어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길동은 도적질한 재물중에서 적정량을 백성들에게 필히 돌렸고 조정에 까지 자기 세력을 심어 정 3품 당상관 엄귀손을 포섭해 온갖 선물에다 가옥을 구입해 주고 곡식을 3천 석이나 주며 재산을 늘리도록해 거사를 준비했고. 홍길동의 능수능란한 꾀에 빠져 도적질을 방조했던 권농과 이정, 유향소의 품관들은 수없이 많았다.

홍길동으로 인해 조선 조정은 조세 정책까지 영향을 끼쳐 1513년(중종 8년) 8월, 호조에서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양전(量田)을 건의하면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이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렵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충청도에 홍길동과 같은 도적떼들이 남아있어 유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홍길동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친 후도 오히려 의적 홍길동은 신분의 벽을 무너뜨리고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만들어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길동은 천민의 신분인 얼자였으나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육도삼략의 병법과 천문지리와 도술을 익혀 큰 인물이 되고자 했으나 신분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등 온갖 설움을 감내해야 했다. 그의 비범한 재주를 시기하던 자들에 의해 자객을 시켜 없애려 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부모님께 하직하고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적떼의 두목이 되었고 기이한 도술과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는 등 도적활동에 나섰다. 거느린 무리를 활빈당이라 이름 짓고 조선팔도 수령들중 가렴주구를 일삼는 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 나누어 주었다. 홍길동은 의적으로 추앙 받았고.

감영의 재물을 빼앗긴 함경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고발한다. 조정에서는 좌·우포청에 명하여 길동을 체포하려 했으나 신출귀몰한 길동의 활약에 관군은 매번 헛수고에 뒷북만 친다. 오히려 우포장 이흡은 길동을 잡으려다 신출한 도술에 걸려 우롱당 한다. 그러자 극약책으로 조정에서는 아버지 홍판서와 형을 시켜 길동을 회유해 체포했다.

조선 왕조 개국 이래 가장 뛰어난 진보적인 혁명가 허균은 목숨을 걸고 부패가 만연했던 16세기 이후 조선의 빈번했던 농민봉기와 그들을 이끌던 주요 인물들의 다양한 설화를 탐관오리들의 수탈, 적서차별의 문제점 등 당대의 부조리한 세태를 솔직하게 꼬집으면서 잘못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진보적 역사의식을 홍길동전에 담았다. 도전 그 자체도 어렵고 민중들의 시도는 좌절되기 일쑤였지만 홍길동전의 소설 속에 나오는 홍길동의 성공신화를 통해 홍길동전을 읽는 민중들은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허균은 홍길동전으로 인해 당대는 물론 조선이 패망 할때까지 고루한 성리학 사대부들로부터 짐승보다 못한 패륜아요 괴물로 묘사되었다. 광해군은 그를 역모 혐의로 처형 후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이라’했다.

허균은 유서 깊은 동인 양반가의 후예로서 뛰어난 학문을 지녔지만 고답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지 않았던 자유인이고 선각자였다. 그는 당대에 수많은 승려들과 교류하며 불교에 심취했고, 중인과 무사들과 어울렸으며 부안의 이매창 등 기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낸 풍류남아였다. 양반의 비첩 소생인 서얼들을 가까이하면서 그들의 불운한 처지를 동정했고,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는 천주교 서적을 들여와 신분타파의 평등사를 연구하기도 했다.

조선의 철벽인 신분제도를 조소하던 허균은 '유재론을 제기하며 신분제도 철폐를 강력히 주장했다. 서자라고 등용하지 않고, 어미가 개가했다고 해서 자식의 재능을 쓰지 않는 것은 실로 부당하다. 하늘이 재주를 낼 때 누구에게나 고르게 냈는데 남녀와 신분을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또한 '호민론'과 '성천부설'을 펼치며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라며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만일 임금과 지배계층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면 궁예나 견훤 같은 호민이 나와 선동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야기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허균은 이처럼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의 자유분방한 개혁 사상을 홍길동전을 통해 세상에 드러냈던 것이다.

허균은 중국의 수호전을 본떠 홍길동전을 지었고, 그를 따르던 무리인 서양갑과 심우영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반란세력으로 몰려 능지처참 되었다.

허균은 한창 일할 나이 오십세에 역모 혐의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조선의 권력자들은 그를 왕조가 끝날 때까지도 극악한 불온분자로 몰아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끝까지 복권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홍길동전은 우리 나라 역사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지금까지도 힘없는 민중들에게 부당한 권력과 부조리한 제도에는 의연히 대처하라 주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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