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공노할 을미사변과 민비의 죽음 이야기

칼럼
천인공노할 을미사변과 민비의 죽음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8.01(월) 10:19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주간
조선의 26대 왕 고종은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이다.

한문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막걸리를 즐겨 마시던, 강화도령 철종 이원범이 후사 없이 죽자 파락호 행세로 절치부심 기회를 노리던 흥선군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비였던 헌종의 생모로 23살에 남편을 잃고 46세에 23살 아들 헌종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 한 많은 과부 신정왕후 조대비와 결탁해 60년 세도정치 안동 김씨 일족들을 몰아내고 12살의 어린 둘째 아들을 마침내 왕위에 올린 후 10년간 대리청정으로 권력을 잡아 조선의 역사를 바꾸었다.

흥선대원군은 척신정치를 우려 해, 여흥 민씨 처가의 먼 친척 뻘 되는 부모도 없는, 고종보다 한 살 연상인 민치록의 딸 민자영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며느리는 고분고분한 규수가 아닌, 무서운 발톱을 감춘 영민하고 겁 없는 철의 여인이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인, 춘추 등을 두루 섭렵한 재원이었다. 시아버지가 면암 최익현의 탄핵으로 물려난 후 권력의 끈을 놓지 못해 치열한 권력다툼이 시작되자 한 치의 양보없이 맞섰고 매직매관으로 재물을 챙기며 여흥 민씨 일족 56명을 등용해 세력을 키웠고 고종의 후궁인 귀인 이씨가 완화군을 생산하자 궁궐에 '진령군'이란 무당을 상주시켜 아들을 낳기 위해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 마다 10냥의 돈과 떡 1섬씩을 바쳐 제를 올리고 친정아버지의 묘를 4번이나 이장하며 외국공사들을 밤마다 불러 파티를 열어 내탕금을 탕진하며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고종이 사정전에 출근해 정사를 처리했다고 한다.

고종은 1m 60cm의 군왕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마음이 유약하고 국난 타개를 위한 장기적 비젼이나 대안도 없이 '언 발에 오줌 싸는 식'으로 나랏일을 처리하며 왕비 민비의 위세에 꼼짝 못하고 아버지인 대원군의 눈치나 살피며 커피를 즐긴 채 미국의 알래스카주 3개를 사고도 남을 가치를 지닌, 운산 금광을 미국에 헐값에 팔아 자동차를 구입하는 등 재물 챙기기에 눈이 먼, 고집 세고 무능한 군왕으로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 되어 독약이 든 식혜를 먹고 1919년 1월 21일 67세로 비명에 갔다.

민비 또한, 130여 년 전 1895년 음력 8월 20일, 작전명 '여우사냥'의 특수암살단 56명과 일제 수비대에 의해 경복궁 곤녕전 옥호루에서 매천 황현의 비판 그대로 "아녀자가 정치에 손을 덴지 10년 만에 결국 나라를 절단" 낸 후 44세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후 건청궁 동쪽 녹산동산에서 시체가 불살라져 그 뼈를 향원정 연못에 뿌려 버렸다.

한 나라의 국모가 구중궁궐 침전에서 타국의 공사관 군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되고도 끽소리 한 번 못 낸 찌질한 남편과 충효를 염불삼았던 성리학에 절여진 위정자들의 그 가증스러움이 기가 찬다.

민비가 죽은 후 120여 년이 흐른 뒤 '뮤지컬 명성왕후'에서 "내가 조선의 국모다."는 카리스마 있는 한 마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당당한 조선의 국모로 조명되었고 시체도 없이 손가락 살점 몇점만을 매장한 홍릉 수목원에서 경기도 금곡으로 이장해 잠들어 있는, 슬픈 역사를 간직한 조선의 왕비였다. 조선의 국모가 비참하게 살해된 '을미사변'의 진실은 아직까지도 그 실체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인채…

일본은 지금까지도 반성은커녕 역사왜곡과 은폐에 앞장섰고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역사가들과 일부 친일파 위정자들은 무언으로 동조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을미사변은,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일본 경찰,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본인 낭인들, 조선군 친일파 훈련대가 결탁해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해 민비와 궁녀들을 집단 살해한 참혹한 사건이었다.

총리 이등박문 연출에, 전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간교한 미국 유학파 1등 서기관 스기무라 히로시의 각본에다 당시 일본 공사 미우라 감독에 일본 공사관 무관인 해군 출신 니이로 소좌의 진두지휘로 여우사냥이 전개되었고 왕비가 거처하던 건청궁을 피로 물들였다.

일제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했던 민비를 천인공노의 잔인한 방법으로 제거한 것이요, 세계적 언론의 지탄을 받자 정적인 늙은 이무기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조선의 내부분쟁 사건으로 꾸미려 했으나 미국 군사훈련관 다이 대령과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 등 외국인들이 사건 현장을 목격하고 외신에 사실을 알렸고, 각국 공사관들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일본인들이 민비살해를 주도했음을 세계에 알렸다.

사건의 배경에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북양함대를 침몰시킨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요동 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에다 전쟁배상금까지 청나라에게 받아냈다. 그러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 반도을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고,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할 수 없이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강대국 러시아와 우호적인 외교를 해 왔던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불러 조-러간 공조를 논의했다.
즉 ‘인아거일(引俄拒日)’의 외교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일본의 이토 내각과 정계, 군부에선 갑론을박 후 결국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교체하고 후임 조선공사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로 바꾸어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시켜 미우라로 하여금 민비를 시해함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다.

동원된 수 십명의 낭인들은 주로 몰락한 쿠마모토 출신의 사무라이로 한성신보 직원들로 위장 채용해 사장인 아다치 겐조와 일본 수비대와 거류지 담당 경찰관들을 동원하고, 훈련대 연대장 우범선·이두황·이진호 등 친일파들을 매수해 포섭했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 등은 왕비 시해 예정일이었던 8월 22일을 앞당겨 8월 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대원군에게 가서 사건의 전말을 종묘에 고할, 고유문(告諭文)을 결재받고, 서대문에서 훈련대 친일파 병사들과 합류해 광화문에 도착했다. 폭도들은 훈련대 연대장 민비의 지킴이 홍계훈을 죽이고, 왕궁을 호위하던 미국인 교관 다이 지휘 하의 시위대들과 교전해 패퇴시켰다. 폭도들은 고종과 중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등 극악한 만행도 저질렀다. 강하게 항의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뒤, 피해 달아나던 민비를 쫓아가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짓밟고 일본도로 시해한 후 민비의 실체를 확인한다며 국부검사에 젖가슴검사까지 서슴없이 자행하고 증거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시신을 화장하는 천인공노할 야만적 행동을 자행했다. 또한 정권에 눈이 뒤집힌 철면피 흥선대원군을 아들 고종과 대면시켜 미리 준비한 조칙 3개안을 재가할 것도 강요했다.

왕비 시해를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위장처리 방안으로 "이번 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이 결탁하여 행한 쿠데타이며,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동하여 훈련대와 시위대의 싸움을 진압했고, 왕비 시해는 아는 바 없다"고 발뺌을 했다.

민비시해사건에 앞장선 친일파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여자와 결혼해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를 낳았으나 대한제국 군인 고영근에게 피살 되었으며 이두황은 1895년 장흥석대들에서 동학군 수 천명을 몰살시킨 악질 친일파에 부패관리로 일본으로 망명해 이름까지 개명해 숨어살다 죽은 후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의 자녀들에 의해 묘지가 훼손된 자 댓가를 치뤘다.

이후 일제는 친일 김홍집 내각을 세운 다음, 8월 22일 왕비 민씨의 폐위조칙과 사건을 위장 발표했다. 그러나 고종과 러시아인 사바틴, 미국인 다이 등 현장 목격자의 제기로 은폐에 실패했다.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각국 외교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미국 공사대리 앨런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각각 군병들을 동원하여 시위를 하는 한편, 각국 공사들과 회합 후 일본의 만행과 폐위 조치 불인정 등을 일제히 발표했다.

이에 난처해진 일본은 사건 관련자를 형식적으로 기소하여 처벌하기로 결정하고 관련 일본인들을 체포하여 히로시마로 압송하는 한편, 미우라 대신 고무라를 주한공사로 교체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철수와 대한불간섭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이노우에를 왕실위문사로 파견하여 사건에 관련된 훈련대를 해산하고 왕비 민씨를 복위시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10월 12일 정동파들이 러시아와 미국인의 협조를 얻어 고종을 궁 밖으로 빼돌리려 한 '춘생문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은 이 사건에 외국인들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자신들의 만행을 희석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1월, 미우라 공사와 폭도 48명을 증거불충분이란 명목으로 석방했고 주모자 대부분은 훗날 일본의 정계와 군부의 실세로 승승장구했고 죽은 후에도 극우계 신사에 정중히 안치 해 영웅 대접을 하고 있다.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왕비 민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으나 일본인들의 관련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피했다. 오히려 조선정부는 사건을 은폐하여 이주회와 윤석우를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후, 이준용을 일본으로 망명 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었다.

일제는 비난을 무마하기 위한 꼼수로 개혁정책을 추진, 단발령과 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의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왕비 시해사건에 대한 백성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해 전국적인 을미의병과 1897년 '아관망명'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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