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조선의 숨은 왕(王) 송익필 이야기

칼럼
이씨조선의 숨은 왕(王) 송익필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3. 02.02(목) 10:43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구봉(九峰) 송익필(宋翼弼)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다. 1534년(중종29년)에 출생했으며 자는 운장, 호는 구봉, 본관은 여산이다. 아버지는 송사련이요. 어머니는 연일 정씨부인이다.

4남2녀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구봉의 할머니 감정(甘丁)은 중종 때 우의정을 지낸 안당의 부친, 성균관 정4품 사예 안돈후와 그의 비첩(婢妾) 중금 사이에 태어난 얼녀(孼女)다.
얼녀인 감정과 훈련원 갑사 송린 에게서 때어난 송사련도 일천즉천법(一賤卽賤法)에 의해 천민이었으나, 당시 우의정 외숙 안당이 조카 송사련의 재주를 아껴 정2품 현임 벼슬아치의 특권으로 장예원 보충대에 손을 써 면천을 시켜 출사(出仕) 시켜 주었다.

구봉은 7살 때부터 시를 지은 신동으로 일찌기 동생 언필과 함께 향시에 합격했으나 사조단자(四祖單子)에 적힌 조부의 출생과 구설로 탈락해 산림처사(山林處士)가 되어야 했다.

1559년(명종14) 26살에 강학당을 설립하고 제자들을 받아 들였다. 구봉의 학당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문과 급제자가 무려 200여 명에 달했다.
구봉을 삼노삼걸(三奴三傑), 산림3걸(山林三傑), 위항삼걸(委港三傑), 조선8문장(朝鮮八文章) 등 여러 호칭으로 그의 학덕을 높이 샀다.

문하생 중 가례집람 등 예서(禮書)를 집대성한 조선예학(禮學)의 태두(泰斗)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두 아들 김집, 김반 부자가 구봉의 예학을 가다듬어 경국대전과 함께 예서들이 조선 성리학의 지침서가 되었고 김류, 이귀 등 인조반정 주도세력과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 노론세력의 주류들이 모두 구봉의 문하에서 지연, 학연, 혈연으로 얼켜 조선 망국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조선을 일제에게 안겨준 구심체였다.

아버지 송사련의 순간적 탐욕으로 출세길이 막혀버린 구봉은 당시 유림들의 화제 인물이었고 호불호의 갈림속에 정쟁이 발생할때 마다 동인세력들은 "구봉 송익필이 서인의 배후에서 조종한 핵심 인물이다."라며 구봉을 '모주(謨主)'라고 악평해 몰아 붙였고 서인들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송강 정철과는 막역한 친구였기에 송강은 구봉의 하수인으로 매도되었다.

구봉의 높은 학문에 대한 일화는 곳곳에서 회자 되고 9도장원랑 율곡 이이가 23세때 대과에 장원급제한 책문(策問)이 천도책(天道策)이었는데 23세의 젊은 선비가 대우주의 신비한 이치를 명쾌하게 진술한, 책문을 본 시험관과 유생들이 깜짝 놀라 설명을 요구하자 율곡은 대충 설명하고 더 상세한것은 구봉 송익필을 찾아가 그 답을 찾으라고 말해 구봄의 명성은 장안에 큰 화제가 되었다.

구봉의 예학은 경(敬)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전개했는데 제자인 사계 김장생 일가로 이어져 17세기 조선 선비문화의 근본 예법서로 예학을 주도했으나 임란과 호란의 양난 후에는 집권세력 서인들이 제 입맛대로 해석해 권력구축과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된채 자기네들 잘못은 추호도 인정하지 않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지 못한 군왕과 반대세력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킨 채 일당독재 정국 운영으로 나라는 파국의 길을 걸어갔다.

​구봉이 세운 예학은 본질이 전도되어 현종과 숙종 때는 예송논쟁으로까지 번졌고 예(禮)의 형식만 남은 탁상공론만을 되풀이 했다.
​구봉은 파주에 살면서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함께 파주3현(破州三賢)으로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은 글 친구들로 학문의 문호(門戶)를 활짝 개방하여 제자들은 스승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원하는 스승을 찾아 학문이 높은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거기에는 다양한 학문의 장을 제공 해 선택강좌를 학습할수 있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준 스승들의 덕택이었다. 파주3현의 제자들 대부분 나중에 서인 당론을 이끈 핵심정객들로 성장했다. 파주3현의 세 사람은 심학산 근처에 모두 살았다.

율곡은 임진강변 율곡리가 고향이고, 우계도 가까운 우계에 살았으며 구봉도 심학산 구봉아래 살았다. 모두가 지명을 따 호를 칭했다. 송강 정철은 고양에서 살았고 동서분당의 발단인, 심의겸도 파주 출신으로 구봉의 문인이었기에 3현의 문하생들도 지연과 학연으로 서인의 당적을 모두 택했다. 구봉이 칩거한, 임진강이 한 눈에 보이는 화석정(花石亭)은 파주3현들의 레스토랑이었고 ​화석정의 주인 마담은 구봉 송익필이었다. 1599년 구봉의 아들 송취대가 파주 3현이 주고 받은 편지글을 모아 발간한 삼현수간첩(三賢手簡帖)에는 많은 비화를 남기고 있다.

대부분 우계와 율곡이 질문하고 그 답은 두살 년장인 구봉이 했으며 율곡이 48세에 지은 격몽요결을 수준낮은 졸작이라고 일일히 지적해 율곡도 구봉의 지적을 쾌히 인정하며 서로 토론했고 성혼이 구봉을 지적하면 구봄도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개방적 토론문화의 자세가 그들을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게 했다고 사가들은 평했다.

특히 구봉은 '조선의 제갈공명'이란 호칭을 들을 정도로 학문과 지략이 뛰어났고 넓은 도량과 포용력속에 그 용모도 보통사람들과는 달랐다고 전한다.
구봉은 눈매가 매우 날카로와 그의 눈빛을 직시한 선조 임금과 평소에 엽신여겼던 사람들은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는 야사가 전한다.
율곡이 죽기전 "조선에 난리가 나면 고봉 송익필과 당대의 도사였던 고청(孤靑) 서기(徐起)를 좌우에 두어 제갈공명으로 삼는다면 난을 석 달 안에 평정할수 있을것이다." 라고 만일을 대비하라 했다는 얘기가 전하고 구봉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화도 있는데 어느날 ​율곡의 소개로 구봉을 찾아갔을 때 이순신은 방안 병풍속 학의 모습이 자신이 상상했던 거북선의 모양과 비슷해 병풍에 네 개의 구멍을 일부러 뚫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송익필이 뚫어진 병풍을 보고 화를 내기는 커녕 제갈공명이라면 48개의 구멍을 뚫었을거라고 태연하게 훈수하자 충무공 이순신은 그의 인품과 학문에 감탄해 밤을 새워 용병술과 진법을 구봉에게 물었다고 한다.

​파주3현의 학행과 특성을 구별하면, 율곡은 서인들의 얼굴 마담으로 벼슬을 하느라 바빠서 제자를 양성할 시간이 없었고, 도학에 능한 우계 성혼은 학문이 높고 실천능력은 뛰어났으나 소극적 인 조용한 학자인 반면, 구봉은 모든것을 전부 갖춘 대학자라며 율곡 조차도 스스로를 낮추며 구봉을 추켜 세웠고 율곡과 우계는 녹봉을 절약해 삶이 힘들었던 구봉에게 보내주는 등 최선을 다해 후원해 주었고 울타리 역할을 했다.

율곡이 48세에 격무의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자 성혼과 구봉은 혼신을 다해 사후 궁지에 몰린 친구 율곡의 변호인 역할을 해 율곡을 기호학파의 간판스타로 만들었다.
율곡이 타계하자 성혼과 구봉에게도 어둠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살아생전높은 벼슬자리에 있었던 율곡이 기호학파의 대표적 존재로 악역과 병풍 역할로 감수하다 죽기 1년 전인 47세에 동인들로 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율곡이 사망하자 동인들은 노론의 뒷배요. 모사꾼이라며 구봉을 공격했다. ‘조선의 숨은 왕’이라고 까지 혹독히 평가했고 망국의 책임도 그에게 전가해 조선 제1의 모사꾼이 되어 버렸다.

구봉이 조선 제1의 모사꾼이 된것은 아버지 송사련 때문이었다. 송사련의 노비 출신 어머니 감정과 우의정 안당은 이복 친남매간이다. 그릇이 큰 우의정 안당은 서조카뻘되는 송사련을 외손으로 인정해 면천을 시켜 연일정씨와 혼인도 주선했고 정5품 관상감 판관까지 오를 수 있도록 뒷배가 되주었다.
​그런데 1521년(중종 16)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간교한 송사련은 외숙인 안당의 아들이자 외사촌 형제 안처겸, 안처근이 비밀리에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조광조 일당이라고 역모죄로 고변했다. 출세욕에 눈이 뒤집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송사련의 고변으로 안당과 세 아들 등 10여명이 처형되고, 집안의 재산과 노비를 모두 송사련이 차지했다. 이 사건을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했다. 송사련은 정3품 절충장군 당상관에 올라 80세의 수를 누렸다. 구봉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나 구봉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고 정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1575년(선조8년) 송사련이 죽은지 11년 후 1586년(선조19) 사림파들이 대거 입조해 힘을 쓰면서 구봉에게 위기가 들이 닥쳤다. 안당의 종손(宗孫) 안로의 처 윤씨부인이 안씨종가의 억울함을 풀어주라는 소가 제기되고 동인들의 비호속에 무고가 재 수사로 밝혀지면서 안당 일가의 신원이 복권되고 직첩도 환급되었다. 반면 구봉 일가의 재산은 안당 집안에 다시 환수되고, 구봉 일가 70명은 안씨일가 노비가 되기 싫어 호남지방으르 도주시켰다.

​이때 동인의 영수(領首)요. 추관(諏官)인 이산해로부터 율곡을 비난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하고 많은 재판자료를 준비했으나 판결이 불리해지자 이산해를 풍자하는 시를 지어 이산해의 분노를 샀고 안씨일가의 추노꾼들에 쫓기는 신세에 동인들에게 공공의 적이었고 불랙리스트 1호의 고생길로 접어 들었다.

​세월은 흘러, 1589년 8월 정여립의 역모사건 기축옥사로 서인들은 찬스볼을 잡았다. 기축옥사는 1,000명의 동인과 영호남 선비 2.000명을 희생시킨 조선최대의 미스터리 사건이다.

​옥사를 추국 책임자는 서인 송강 정철이었는데, 정철의 배후에는 구봉이 조종했다는 설이 파다했다. 구봉과 정철의 동인세력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구봉의 천재적 모사와 정철의 한풀이로 사건이 키워져 부풀려졌다는 역사적 논란속에, 변덕쟁이 선조 연출, 꾀주머니 구봉 각본, 주정뱅이 송강 감독, 기축옥사의 역사드라마는, 서인 집권 300년의 첫 신호탄이었다.

구봉의 처지도 기축옥사로 전화위복이 되어 피해 다니는 신세는 면했으나 그로부터 2년 후 1591년, 송강 정철이 선조의 아킬레스인 건저(建儲)문제를 동인 이산해 등의 계략에 걸려 정철은 귀양을 갔고 구봉은 또 다시 쫓겨 다니다 방랑거사가 되었다.

​구봉 송익필의 복권(復權)은 그가 죽은 지 24년 후에 일어난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제기된다. 서인에 의한 쿠데타 인조반정의 두 주역 인 이귀는 고봉의 제자였으며 김류는 송익필의 수제자 김장생의 제자고, 김류의 아버지 김여물도 구봉의 제자였다.

김자점, 신경진, 이서.구굉 등 1등공신 6명이 모두 구봉의 수하 문하생들이였다. 반정의 명분이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광해군의 패륜을 꺼내들어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확립하고 폐모살제(閉母殺弟) 의 그릇된 윤리질서를 바로잡자는 슬로건이 바로 구봉이 발현하고 제자 김장생이 정립한 예학이 반정의 명분세우기에 그 한 몫을 톡톡이 한셈이다.

​서인들의 정신적 구심체인 사계 김장생은 이귀를 시켜 인조에게 여러차례 스승인 구봉 송익필을 복권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바로 성리학의 핵심 논리인 의리(義理)를 저바렸기때문에 명분론을 내세운 같은 서인들마저 거부해 복권이 되지 못했다.

다만 김장생의 수제자 송시열은 송준길과 의논해 구봉의 묘비문을 짓고 비석도 세워 혼을 달랬다. 그 후 영조 때 구봉 송익필을 정5품 사헌부 지평에 증직하고, 1910년 순종때 종2품 홍문각 제학에 추증되면서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고 논산 휴정서원에 배향되었다.

탐욕에 눈 먼 아비의 순간적 악업이 수 백년에 한 두명 나올수 있는 뛰어난 천재가 나라를 위해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성리학의 신분질서의 덫에 걸려 제자들의 집을 전전하며 1599년(선조32) 66세로 당진군 마양촌 숨은골에서 쓸쓸히 최후를 마치며 사라졌던, 조선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리학자가 구봉 송익필이였다고 매천 황현은 추모시를 바쳤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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