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

칼럼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
김종수 목사의 ‘하늘샘물 흐르는 곳에’
  • 입력 : 2023. 02.16(목) 10:11
  • 영암일보
김종수 목사
해마다 아이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준비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포기하지 않는 한, 시험을 치러야 한다.

종종 시험을 앞 둔 아이들 중에 ‘올해에는 안 되겠다. 내년에 재수를 해서 잘 봐야지.’라고 생각하며 포기하듯이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이 있다. 대개 이런 아이들은 재수를 해도 실패한다. 시험 공부를 많이 했든 적게 했든, 그리고 시험 날이 얼마 남았든,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재수를 해도 성공한다. 오늘의 기회를 포기하고 내일의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그 내일 역시 오늘의 재판이 될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속으로 ‘올해는 시험 준비를 게을리 했으니 이번 시험이 끝나면 다시 마음을 잡고 재수를 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시험이 끝나면 ‘그래도 지금까지 고생했는데 좀 쉬고 해야지.’ 하며 시험 끝난 아이들과 어울려 놀게 된다. 마음으로는 ‘크리스마스 때까지만 놀아야지.’ 하지만, 밤새 피곤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면 ‘새해 1월1일부터 새 마음으로 해야지.’ 한다.

이것이 내년 봄으로 이어지고, 봄에는 나른해서 못 하고, 여름에는 더워서 못 한다고 한다. 어느새 또 시험 날짜는 성큼 다가온다. 결국 작년과 다를 바 없는 한 해를 보내게 된다.

그러므로 시험이 몇 달이 남았건, 며칠일 남았건, 그리고 현재 실력이 있건 없건, 오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부딪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오늘이다. 과거의 게으름과 나태함, 어리석음을 생각하며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 문제는 오늘 그 과거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이다. 돌이키는 오늘이라면 내일 시험이라도 괜찮다. 설령 그 시험에 실패해도 좋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연장이며 타성의 연장인 오늘의 실패와 과거를 단절시킨 오늘의 실패는 같은 오늘이라도 결코 같지 않다. 일단 그는 과거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럴 때 분명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된다.

이것은 단지 입시 이야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도 그러하다.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도 여전히 어제의 타성과 죄에 얽매여 있나?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타성과 조의 노예다. 문제는 오늘 그 노예에서 벗어날 결단을 하고 떠나는 것이다.

출애굽기 12장 1절 이하는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노예로 살았던 이집트를 떠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놀랍게도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 아니었다. 노예 생활을 벗어날 능력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여전히 노예 팔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갑자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를 떠나라고 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가 쉬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밤 지체하지 말고 당장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저녁 식사도 정식으로 차려 먹을 시간이 없이 떠나라고 하신다.

출애굽기 12장 8절을 보면 저녁 식사로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으라는 말이 나온다. 즉 나물의 쓴맛을 우려낼 시간도 없이 쓴 나물 그대로 먹으라는 것이다.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말한다. 말하자면 누룩을 넣어 부풀게 한 정상적인 떡이 아니라, 누룩을 넣어 부풀릴 시간이 없으니 누룩 없는 떡을 먹으라는 것이다. 매우 긴박한 상황임을 말해준다. 더욱이 출애굽기 12장 11절은 그 긴박성을 더해주고 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허리띠를 풀고 신을 벗고 지팡이를 놓은 채 느긋한 마음으로 식사를 해야 할 그 밤에, 하루의 피곤을 씻고 쉼을 가져야 할 그 밤에, 오히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적당히 요기하고, 허기나 면하는 정도로 먹고 떠나라는 이야기다. 떠나야 할 시간의 긴박성을 말해준다.

왜 이렇듯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급히 떠나라고 재촉하시는 것일까? 왜 하필 밤에 야반도주하듯 떠나야 할 시간의 긴박성을 말해준다.
왜 이렇듯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급히 떠나라고 재촉하시는 것일까? 왜 하필 밤에 야반도주하듯 떠나야 되는 것일까? 왜 하필 밤에 야반도주하듯 떠나야 되는 것일까? 내일 아침 떠나면 안 되나?

이것은 구원의 긴박성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 밤 노예지인 이집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은 없다. 만약 오늘 밤이 아니라 ‘내일 아침에 가지.’하면 그 내일은 다음 내일로, 그리고 또 그 다음 내일로 이어진다. 지난 400년간의 이집트 노예 생활이 그러했다. 노예 근성이 아예 체질화되었다. 팔자가 노예 팔자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잘 알 것이다.

‘내일부터 하지.’, ‘오늘까지만 이렇게 살지.’ 하다가 그 오늘이 언제까지 연장되었나?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을 먹되, 그것도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는 것은 바로 오늘, 내일이 오기 전 오늘 밤, 지난 노예로 살아왔던 삶을 떠나지 않으면 내일의 해방은 없다는 것이다. 오늘 죄를 씻고, 지나온 타성을 오늘 떠나지 않으면, 내일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다. 오늘은 항상 마지막 오늘이다. 오늘 회개하지 않으면 내일은 심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오늘 회개하면 내일은 해방과 구원으로 열어갈 수 잇다. 이것이 바로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의 긴박한 시간적 의미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것을 종말론이라고 말한다.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떡, 이것은 단지 긴박한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본질의 문제이다. 사실 나물의 쓴맛은, 잃어버린 입맛을 다시 살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을 제공한다. 봄이 되어 입맛이 없을 때 쓴 나물을 먹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도 그런 데서 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쓴맛이 싫어서 쓴맛을 다 우려내고 단지 섬유질만 남은 것에다 양념을 쳐서 먹으며 맛있다고 한다.

사실 떡도 그러하다. 누룩을 넣어서 만든 떡은 부드럽고 사람들의 입에 착착 감긴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은 딱딱하고 맛이 없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해주는 본질은 떡을 만드는 곡실 속에 있는 성분이지 누룩은 아니다. 누룩은 떡을 부풀리고 부드럽게 하여 맛있게 만드는 구실을 하는 촉매제에 불과하다. 누룩은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물의 본질이 쓴 것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쓴 것을 우려내고 양념에 무친 나물을 맛있다고 하듯이, 삶의 본질은 잃어버리고 그저 감각적이고 말초신경적인 흥미와 재미만 남은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누룩이라는 비본질에 매달린 채 삶의 깊이를 상실하고 삶다운 삶 한 번 살아보지 못한 채 흘러가는 인생은 아닌가?






[약력]
현 목포산돌교회 목사
현 전남 NCC 회장
현 목포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