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과 형옥(刑獄)

고전산책
가뭄과 형옥(刑獄)
  • 입력 : 2023. 02.16(목) 10:13
  • 영암일보
봄 농사가 한창인 시기 봄가물이 들었다.

석강 자리에서 도승지 현석규가 기우제 지낼 것을 요청했다. 성종은 그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고는 바로 이어 형옥 또한 지체하면 안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에서의 형옥은 형사 사건을 의미하는 말로, 형옥을 지체하면 안 된다는 말은 곧 형사 사건에 대한 심리와 처결을 신속히 진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종은 왜 가뭄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형사 사건 얘기를 꺼냈을까? 하루빨리 처단해야 할 흉악한 죄인이라도 잡혔던 걸까? 온종일 그 죄인을 처단할 생각만 하다 보니 불쑥 저런 말이 튀어나왔나 보다. 도대체 얼마나 흉악한 놈이기에? 내가 만약 수년 전에 이 기사를 봤다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성종이 재난 대책과 같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다 말고 불쑥 딴 얘기를 했을 리는 없다. 성종이 형옥을 지체 없이 처리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렇게 해야만 가뭄이 그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를 하늘이 내리는 꾸짖음[天譴]으로 여겼다. 유교의 전통적인 자연관에 따라, 위정자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백성의 원망이 쌓이면 그 원망이 자연의 조화로운 기운[和氣]을 상하게 하고 이에 감응한 하늘이 위정자를 꾸짖기 위해 자연재해를 발생시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임금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자신의 정사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 돌아보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기 위해 힘썼다.

그래야 하늘이 꾸짖음을 멈춰 자연재해가 그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큰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주거나, 고된 요역(徭役)을 면해주거나, 광부(曠夫 아내 없는 남자) 및 원녀(怨女 남편 없는 여자)를 혼인시키는 등의 조처를 시행한 것은 이런 관념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형옥을 빨리 처리해야만 가뭄이 그칠 것이라고 여기는 성종의 생각도 이런 관념에서 비롯했다.

즉 형옥이 지체되면 백성의 원망이 쌓여 가뭄이 발생하고, 형옥이 지체되지 않으면 백성의 원망이 해소되어 가뭄이 그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의문이 든다. 형사 사건을 심리하고 판결하는 데에 '지체됨'이 문제가 된다고 본 것은 어째서일까? 예컨대 심리의 허술함이나 판결의 부당함, 절차상의 불공정함이라고 한다면야 또 모를까, 그 지체됨으로 인해 백성이 원망을 품게 된다는 생각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혹시 죄인이 하루빨리 판결을 받고 처벌되어야 피해자의 원한이 빨리 풀릴 것이라고 여겼던 걸까? 수년 전 어느 수업에서 똑같은 문제가 나왔을 때 내가 실제로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는 있지만 꼭 맞는 답은 아니다.

형옥의 지체됨은 오히려 피의자 쪽인 옥수(獄囚)의 원망에 더 깊이 관계되는 사안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시대의 옥(獄)이 기본적으로 미결수를 가두어 두는 시설이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감옥(교도소)은 형벌을 집행하는 차원에서 죄인을 가둬 형기(刑期)를 살게 하는 곳이지만, 조선시대의 옥은 죄명의 확정(판결) 및 형벌의 집행 전까지 해당 사건의 피의자나 연루자의 인신을 구속해두는 곳이었다. 따라서 옥수 중에는 무고한 사람이나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 형옥의 처리가 지체된다는 것은 특히 이런 사람들이 옥에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짐을 의미했다.

사실 형옥의 처리 지연은 조선시대 형정(刑政)의 만성적인 문제였다. 형옥의 판결 기한은 『경국대전』에 관련 문서 수발, 증거 수집 등에 소요되는 시간을 제외하고 최대 30일 이내로 정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해를 넘기는 일이 잦았고, 심한 경우 십수 년에서 수십 년까지 지체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석방될 사람이나 가장 가벼운 형벌인 태형(笞刑)을 받을 사람이 판결을 받기도 전에 옥중에서 사망하는 일도 왕왕 발생했다.

더욱이 조선시대의 옥살이는 무척 괴로운 것이었다. 옥수는 으레 극심한 추위와 더위, 굶주림, 질병으로 신음했고, 거기에 옥졸(獄卒)의 핍박과 고문까지 더해졌다. 오죽하면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옥은 이승의 지옥[陽界之鬼府]이다.’라는 말까지 했겠는가. 아무리 죽을죄를 지은 죄수라 해도 저세상 수준의 가혹한 고초를 겪다 보면 자연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물며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나 대수롭지 않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 오랫동안 옥살이를 겪고 급기야 목숨을 잃게 된다면 하늘까지 사무칠 원통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또 오랜 옥살이는 옥수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깊은 고통을 안겼다. 옥바라지를 계속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옥수가 가장인 경우라면 그 부양가족의 생계가 완전히 끊어져 버리기도 했다. 아무런 잘못 없이 그저 옥수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곤궁을 겪다 보면 그 마음속에도 역시 원망의 감정이 움텄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형옥의 처리에 있어 정확함뿐만 아니라 신속함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잘못된 판결로 억울하게 처벌을 받는 사람이 생기는 것만큼이나 판결의 지연으로 억울하게 오랫동안 옥살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 또한 백성의 원망 및 그로 인한 자연재해를 초래할 중대한 실정(失政)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날 대화를 나눈 성종과 도승지, 그리고 그 대화를 기록한 사관에게 ‘가뭄이 들었으니 형옥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비가 오니 어서 우산을 써라.'라는 말만큼이나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는 지극히 당연하고 분명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날의 기사는 단 24자의 짧은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 세 사람은 상상이나 했을까? 500년도 더 지난 먼 미래의 누군가가 이 명백한 맥락의 대화를 보고서 의심을 품고, 전혀 엉뚱한 추측을 하고, 그 추측의 오류를 바로잡느라 2천 개가 넘는 글자를 쓰게 되리란 걸.

때로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은 말이나 글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옛 기록을 볼 때 무엇이 기록되지 않았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때는 당연했으나 지금은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 그래서 기록으로는 남지 않은 공백의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를 찾아내며 뜻밖의 진실을 알아가는 것 또한 옛글을 읽는 한 가지 즐거움이 아닐까.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