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지'의 유래 이야기

칼럼
'노다지'의 유래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3. 02.16(목) 10:26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옛날 우리 조상들은 물론 오늘날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황금을 매우 좋아했다.

온 몸을 금으로된 장신구와 보석으로 치장하거나 결혼과 돌잔치에도 귀한 선물로 이용되어 왔다.
갑자기 큰 돈을 번 경우를 '노다지'를 캤다고 하며 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는 얘기로 통하는, 어느새 우리 말로 쓰이고 있다. 이 노다지란 용어의 진원은 조선 말기 평안북도 운산금광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 어원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미국인 알렌이다.

알렌은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해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와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미국 장로교회 의료 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었다가 1884년 조선으로 건너왔다. 주한 미국공사 푸트와 개인적 인연이 되어 조선에 선교차 입국하게 된, 선교사 알렌의 신분안전을 고려 해 푸트 미국 공사는 미국공사관 무급의사로 임명해 함께 조선에 입국을 했다. 알렌은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들로 부터 신체의 13곳을 난도질 당해 중상을 입은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어의가 지켜보는 가운데 외과 수술로 완치해 준 사람이 바로 알렌이었고 갑신정변으로 고종과 민비를 알게 된 첫 계기가 되었으며 알렌에 대한 그 보은의 댓가로 제중원의 전신(前身) 광혜원의 설립과 조선왕실 서양 의사에 조선왕실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또한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인 광혜원에서 서양의술을 조선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교육을 했다.

그러나 병원 개원 후 일부 선교사들과의 잦은 마찰로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 정2품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자격으로 미국에 귀국해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국무성에 요청했고 주한미국 공사관 서기관을 역임 후 총영사와 대리공사에 올랐으며 고종과 민비의 신임도 두텁게 받았다 .

당시 조선은 뒤늦게서야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의료 근대화 작업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1881년 조사시찰단이 일본에서 서양식 병원을 탐방하고 온 후 1884년 한성순보도 서양의학 교육기관 설립과 병원 개원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때를 같이해 미국의 감리회 선교사 맥클레이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고, 1885년 2월 한성의 지금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이 드디어 문을 열었던 것이다. 그 자리는 원래 갑신정변의 주모자였던 홍영식의 자택이었는데 집터를 나라에서 압류해 병원을 건축했고 제중원(劑衆院)으로 개칭했다.

더불어 조선의 고종과 민비는 조선의 운산금광을 알렌의 요구대로 미국기업에 채굴권을 넘기는 등 알렌에게 최대의 수혜와 파격적인 대접을 해주었다.
운산금광은 아시아 최대의 금 보유량을 자랑하는 엄청난 금광이었다.

그런 금광이 하루아침에 미국으로 넘어가 미국 회사가 금을 채굴하기 시작하면서 지역 주민들로서는 금을 구경하고 싶어 철조망으로 몰려들었다.
몰려든 조선 백성들에게 미국인들이 “금광석을 건드리지 마라”는 말로 ‘No Touch’라 했고, 그 지역 주민들은 ‘금’을 영어로 ‘No Touch’라고 부르는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노다지’라는 말로 자연스럽게 변형되어 나온 말이다.

​'건드리지 마'를 영어로 하면 ‘Don't Touch’인데 ‘No Touch’로 한 것은 ‘Don't Touch’는 알아듣기 힘든 영어라서 ‘No’라고 하면 알아듣기가 더 쉬웠기 때문에 미국인들 조차도 콩글리쉬인 ‘No Touch’로 발음을 한 것이고, 그것이 노다지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당시 어찌나 조선사람들이 채굴된 금을 구경하려고 많이 몰려들어 알렌은 광산회사에 황금을 건드리는 조선인에게 태형으로 다스리라는 편지까지 보낼 정도로 조선인들과 미국인들도 황금에 눈이 어두웠던 것이고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던 미국의 제국주의 근성을 제대로 보여준 본보기다.
​그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납작 엎드려 은둔할 때 서양은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유럽의 제국들에게 막강한 힘과 부를 제공했다. 식민지나 약소국에 대량 살상무기를 싣고 떠났던 유럽의 상선들은 금은보화를 싣고 자기나라로 귀국했다.
1793년 청나라 건륭제가 영국에게 자유무역을 불허하며 서서히 침몰해 1840년 아편전쟁으로 난파하는 모습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채 조선은 눈을 감은 맹인국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요시다 쇼인등 선각자들에 의해 반강제 반자발적이나마 개화의식을 일찌기 가졌고 개화사사을 견지해 문호를 과감히 열었다.
철갑을 두른 이양선(異樣船)이 조선의 서해와 남해에 수시로 출몰해 개화와 통상을 요구했으나 모두 거부하고 말았다. 결국 1875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일본을 강제로 문호를 연 그 방식 그대로 일본은 강화도에 함포 사격이 시작되고 이듬해 조선도 할수 없이 문을 열어야 했다. 1876년의 '강화도수호조규'다.
이리하여 서구 열강은 조선과 통상을 요구 했고 미국을 선두로 조선과 조약을 맺은 서구 열강들은 조선의 금맥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외교관을 필두로 광산기술자. 지질학자.군인.상인들을 동원해 금맥을 찾아 나섰다.

고종이 가장 먼저 금광 채굴권을 선물한 나라는 바로 알렌의 조국 미국이었다. 그 배경에는 선교사요.의사였던 외교관 알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884년 9월 14일 스물여섯 먹은 선교사 호러스 알렌은 청나라 상해에서 지금의 인천인 제물포행 배에 올랐다. 며칠 전 아기를 낳은 아내 패니를 상해에 남겨둔채 9월 20일 알렌은 나가사키와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한성이었다.

당나귀를 타고 서울로 가다가 알렌은 주막에서 나반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나반은 “조선에는 금이 풍부하다”고 알렌에게 알려줬다.
귀가 번쩍 트이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했다.

그 해 12월 4일 밤 김옥균.홍영식.서재필이 주동한 갑신정변이 터졌다.
종로 우정국 낙성식에서 벌어진 이 정변에서 권력의 실세였던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이 칼로 난자 당했다. 오른쪽 귀 뒤쪽 동맥이 끊어지고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이 잘려나갔다. 온몸이 칼집 투성이였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있던 알렌은 급한 호출을 받아 조선의 한의사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밤새 수술 끝에 민영익을 살려냈다. 민영익은 미국 알렌에게 10만냥을 치료비로 줘 사례했다.

​해가 지나고 1885년 3월, 고종 부부가 알렌을 찾았다. 알렌은 천연두를 앓고 있던 조대비와 고종 그리고 왕비 민씨를 차례로 진찰하고 치료해줬다. 한 달 뒤 알렌은 왕비로부터 비단 한 필과 조선 두루마기도 선물 받았다. 알렌은 조선 왕실 주치의 겸 국왕의 정치고문이 되었다.

고종이 고문 알렌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미국 정부의 관심을 유도하고 청나라 간섭에서 벗어나겠는가?”

알렌이 대답했다.
“평안도 운산금광을 미국의 기업에 주시라.” 했다.

이미 미국인 사업가 타운센드를 통해 운산금광 탐사를 마쳐 매장량을 파악한, 알렌의 의도적이고 준비된 답변이었다. 운산금광이 미국 기업에 넘어간 것은 알렌의 역할 때문이었다. 알렌을 통해 미국 기업인 모스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주라고 전격 지시했다. 계약은 전격적으로 체결되었고 조건은 25년간 채굴권 보장과 면세에 다른 광물도 채굴 가능하며 조선 왕실이 지분 25%를 소유해 연간 2만 5000달러씩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알렌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미 국무장관 실은 “이보다 더 조건이 좋을 수 없다."고 환호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암살되면서 계약은 잠시 취소됐으나 아관파천 중이던 1896년 4월 17일 고종 정부는 계약을 정식으로 다시 허가했다.

운산금광이 미국에 넘어 갔다는 소식에 조선에 들어와 있던 모든 나라들은 동일 조건으로 금광 탐사와 채굴권을 달라고 조선을 강하게 압박했다. 조선은 땅속까지 열강에게 털리고 있었다. 1899년 3월 27일 대한제국 고종은 일시불 1만 2500달러를 선금으로 받고 채굴기한을 40년으로 연장해 주었다.
운산금광에서 미국은 황금을 실은 소 달구지 40마리가 광산과 항구를 오가며 황금을 쓸어갔다. 생각도 못한 금광 허가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금 생산국이 됐다. 운산은 아시아에서 제일 수익성이 좋은 광산이었고 1939년 미국 기업이 철수할 때까지 거둔 순익은 미화 1500만달러가 넘었다
.
이처럼 조선 최대의 운산금광이 작은 이익에 눈이 먼 조선 국왕 고종 이희의 국가의 미래보다는 내탕금을 확보키 위한 개인적 탐욕과 단순한 판단으로 막대한 국가적인 경제적 손실을 가져왔고 그 돈으로 사치를 즐기며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정사를 보다가 결국 조선 망국의 결과를 초래 했으며 운산금광 등 조선의 여러 금광들을 외국기업에 채굴권을 팔아 넘긴 엄청난 그 돈돌을 외국은행에 맡겼으나 일본이 미리 알고 가로채 버렸다니 참으로 분통하고 기가 막힌 역사의 한 장면을 조선의 고종이 연출한것이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