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왕족과 귀족에 대한 경칭 이야기

칼럼
조선 시대 왕족과 귀족에 대한 경칭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3. 02.23(목) 11:04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황제(皇帝)의 칭호는 대제국(大帝國)만이 가질수 있다.
황제는 제후국(帝侯國)을 거느리고 있어야 하며 독자적 연호(年呼)도 있어야 한다.
중국 최초의 황제는 7개국을 통일했던 진나라 진시황(秦始皇)이요.

서양에선 시저가 최초의 황제였다.

우리나라의 황제는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인 '영락'과 묘호 '국강상호태왕'을 사용한 고구려국 광개토대왕 고담덕이다.
황제라 칭하기에는 애매 모호한 점이 많다고 사가들은 지적하며 확실한 기록은 없고 비문의 기록만 존재해 앞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의 마지막 황제는 이씨조선의 고종 이희다. 1897년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 '광무'를 사용했으나 명분과 무늬만 황제였을뿐 실제로는 대제국의 황제가 갖추여야할 여러가지 조건들을 충족치 못했다고 사가들은 저평가했다.

황실과 왕실에 대한 호칭의 단계는, 폐하(陛下), 전하(殿下) - 저하(邸下), 합하(閤下), 각하(閣下), 궤하(机下), 좌하(座下), 족하(足下), 마마, 마노라(抹樓下)의 10단계 호칭이 있었다.

자가(慈駕)는 왕실과 종친들의 신분질서에 따른 경칭으로 사용했다.
신하들은 대감(大監), 영감(令監), 원님(員님), 나리(進賜), 선생(先生)이라고 품계에 따라 호칭을 달리 했다.
'폐하'는 동아시아에서 황제나 황후에 대해 사용되는 최고의 경칭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황제와 태상황과 상황에게만 '폐하'라는 호칭을 썼고, 황태자,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에게는 '전하'라는 호칭을 쓰도록 했다. '황후폐하'라는 호칭은 원래는 유럽왕조에서 사용했는데 동아시아 제국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해 황태후에게도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황태후 폐하'라는 용어는 중국의 한서에도 기록이 나오며 폐하보다 더 높은 표현은 없고 동격 표현으로 성하, 폐하보다 격이 낮은 표현으로는 전하, 저하, 합하 등이 있다.
일본은 천황과 황제라는 존칭 등 독자적 호칭을 사용하면서 정신적 지주와 종교적 교주처럼 대접하고 불러 왔는데, '폐하'라는 호칭을 처음에는 오직 천황에게만 사용했으나 이후 황후에게도 확대해 사용 했고, 황태자는 '전하'라고 호칭했다.

우리나라는 원 간섭기 60년을 제외한, 고려는 멸망할 때까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간헐적으로 사용했다.
태조 왕건은 칭제는 하지 않고 천수란 연호를 사용했고 고려 4대 임금 광종은 칭제건원을 제대로 시행한 군주였다.
연호를 광덕(廣德), 개풍(開豊)이라 했고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칭했으며 금상폐하(今上陛下)라는 황제의 호칭을 사용했음이 원호탑비 비문에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종(宗)이나 폐하(陛下), 태후(太后), 태자(太子), 절목(節目), 제조(制詔)를 사용하였다.

이씨 조선말 1887년 10월12일 대한제국 선포때는 아관파천 이후에 대군주인 황제의 표현과 광무(光武)의 연호를 고종이 사용하였다.
태상황이나 태황태후는 황실의 웃어른으로서 황제를 부를 때는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한 나라의 지존인 황제에 대해 마음대로 휘를 부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황상(皇上), 성상(聖上). 주상(主上). 금상(今上), 상감(上監)으로 불렀으며, 부자간, 모자간, 조손간 일지라도 황제나 군왕에게는 함부로 말을 놓지 못했으며 경어를 사용했다.

오직 태상황은 아들인 금상에게 말을 놓아도 문제가 없었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석에 한정했고 공석에서는 반드시 존대를 해야만 했다.
폐하, 전하를 한자로 풀이하면 '섬돌 아래'라는 뜻으로,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궁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전으로 오르내리는 층계 아래를 가리킨다. 어원은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신하가 층계 아래에 서서 '제가 여기에 있으니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라는 의미에서 부르는 경어체이다.
그러니까 중국 왕조의 예법에서는 '폐하'의 호칭은 오직 천하를 지배하는 천자에게만 쓸 수 있던 유일한 경칭이었다.

중국 왕조의 제후들과 군주에게는 '전하'라는 경칭을 사용해야 한다. 간혹 외교상으로만 제후인 척 나라안에서는 '우리 군주도 중국 왕조 황제와 같은 동급'이라는 인식으로 '폐하'란 암암리에 경칭을 사용한 일도 있었으나 정확히 지적하면 잘못 적용이었고 황제국에서 알게 되면 크게 질책 받을만한 사안이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이 '폐하'란 경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하나, 정확한 사료가 없고, 가장 오래된 역사적 사료는 백제 무왕을 '대왕 폐하'로 지칭했던 '미륵사사리함기'가 첫 역사적 기록이고 다음은 신라 문무왕이나 신문왕, 효소왕 등 신라 중대의 왕들을 '폐하'로 칭했다고 일연의 삼국유사에 전한다.
역대 왕조 중 '폐하' 란 경칭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왕조는 고려국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천자' 및 '폐하'로 칭했던 이인로의 '파한집'에 그 기록이 등장하며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며 왕권을 강화했던 고려 4대 임금 광종을 '우리 황제폐하(我皇帝陛下)'라고 칭하는 '고달사 원종대사비'가 전한다.

고려는 자기나라 임금을 '해동천자', '성상 폐하' 등으로 존칭하였고 왕위 계승자의 경칭도 '태자 전하'로 부르는 등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몽골과의 전쟁 이후 몽골의 제후국이 되어 여러 예법들이 강제로 격하된다. 고려는 이후 '주상 전하', '세자 저하'와 같은 제후국의 경칭을 사용하게 된다. 고려말 공민왕이 자주개혁을 시도하며 '주상 폐하'라는 경칭을 스스로 사용하는 등 옛 왕실 예법을 회복했으나 공민왕의 사망으로 얼마 가지 못했다.
고려의 뒤를 이은 이씨조선 왕조는 성리학에 입각해 스스로 제후국을 자처해 제후국예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따랐다.
종주국 명나라를 중화라고 추켜 세우며 자국은 소화로 낮춘채 사대주의를 고집했다.

특히 임진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서인들이 집권후는 백성의 안위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외친채 오직 명나라를 대국으로 자나깨나 섬겼다.
고명주청(誥命奏請) 이라는 용어 그대로 조선의 왕이 궐위되고 새 왕이 즉위하였을 때 명나라 조정에 사신을 파견해 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는 고명을 발급해 주도록 요청하는 일이 급 선무였고 외교업무의 큰 사안이었다.

조선의 왕이 병사하거나 선양에 의하여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나 세제가 순조롭게 즉위하였을 때나 반정으로 왕이 축출되고 새 왕이 즉위하였을 때 중국 명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고 새 임금을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는 임명장인 고명(誥命)을 받아야 했다.
고명을 주청했던 외교는 삼국시대 이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었던 ‘조공(朝貢)-책봉(冊封)’의 외교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주변의 약소국들은 중국의 정통 왕조를 종주국(宗主國)으로, 자기 나라를 종속국(從屬國)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봉건 체제를 스스로 채택해 평화롭고 안정적인 나라 질서를 도모하였다. 약소국의 사대(事大)에는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우산속에 스스로 끼여들었다.
중국의 황제가 내려주는 고명은 번국의 왕들에게 외교적인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한 보증수표였으며 필수적인 절차가 되어 정상적 계승의 왕은 물론이요.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 의희

특히 반정이나 쿠테타 등 물리적 방법으로 즉위한 왕은 중국 황제의 고명을 받는 데 엄청난 공을 들여야 했다.
1392년(태조 1) 7월 17일에 역성혁명으로 즉위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수 차례 명나라에 고명사신을 파견해 고명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 홍무제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 건국까지 혼란스러운 고려국 왕위 계승 문제 때문에 불신을 야기했고 조선의 국호를 내려 주기는 했으나, 조선 국왕으로 책봉해 주지는 않았다. 1401년(태종 1) 이방원이 즉위 후 명의 건문제(建文帝)로부터 조선 왕의 책봉 고명과 금인(金印)을 내렸으나, 1402년 영락제(永樂帝)는 종전에 내렸던 고명과 인신을 취소하고, 1403년에 새로이 책봉을 인준했다. 그후 조선의 왕들은 대부분 즉위 초에 명나라로부터 고명을 받았다. 그 댓가로 조선은 수시로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고 사대의 예를 다하여 외교 관계 유지에 힘썼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淸)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조선의 왕들은 청으로부터 고명을 받게 되었다. 중국과의 책봉-조공 관행은 청일전쟁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자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끝을 맺는다.
그후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러서 조선 왕조가 동아시아식 외교관계 청산을 선포하면서 "주상 전하"는 "대군주 폐하"로, "왕세자 저하"는 "왕태자 전하"라는 형태로 복귀되었고, 고종 황제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 폐하"."황태자 전하"라는 존칭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13년 후 일제강점기부터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 천황가 아래의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면서 다시 "전하"라는 제후국의 호칭을 따르게 되었고, 일제 패망 후에는 왕족 자체가 사라져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되었다.

이처럼 동북 아시아에서는 대국이라고 자처했던 중국만이 오직 천자와 제후의 기본국이고, 나머지는 오랑캐로 치부했다. 따라서 오랑캐들은 황제의 용어를 참칭할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서양의 속국과 비슷한 곳은 번(藩), 즉 번국이며, 이 번은 '울타리'를 뜻하며 '번왕' 혹은 '영주'가 다스리도록 했다. 따라서 왕의 작호도 친왕이나 군왕이 아니라 국왕이 되었던 것이고, 형식적 책봉관계가 반드시 연계 되었다.
오직 '폐하'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단(天檀)을 쌓을수 있고 '하늘의 대리자'요. '하늘에 제약을 주고 받는 유일한 존재'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약력]
월봉 김오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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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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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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