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 이야기

칼럼
우리민족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3. 03.16(목) 12:38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우리나라 유림(儒林)에서는 우리 민족 마지막 자존심을 지닌 최고 선비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꼽는다. 그렇다. 심산의 유학(儒學)에 대한 재정립과 항일 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점철된, 60평생 선생의 삶 전체를 조명해 볼때, 티끌만한 잘못도 개인적 욕심도 전혀 부리지 않은, 오직 선비정신의 본질인 의(義)를 추구하고 실천하다 순국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선비로서 마땅히 추앙 받을 만한 정치인이요. 독립운동가에 교육자가 틀림없다.
심산은 1879년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문좌(文佐)이며 호는 심산(心山)이다.
영남지방의 유학자 아버지 김호림과 의지가 강한 어머니 인동 장씨 사이에서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미군정,제 1, 2, 3 공화국까지 살다간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심산은 일제강점기때는 나라안에서 유림 대표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활동이 어렵게 되자 상해로 망명한 후 백범 김구 주석과 함께 항일운동에 참여해 여러차례 옥고를 치루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에는 귀국하여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에 나서 백범 김구의 민족적 통일노선을 지지하였으며 침체된 유도회(儒道會)를 재건해 조직하고 유도회 회장 겸 성균관 관장을 지냈으며 민족 대학인 성균관 대학교를 건립한 교육자였다고 이승만정부와 박정희정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도 앞장을 섰다.

심산은 출생지 영남의 지역적 특성과 가풍에 따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올바른 교육만이 구국(求國)의 길이라고 판단 해 가산을 털고 모금하여 사립 성명(星明) 학교를 설립해 신식교육을 펼쳐 지방 인재를 양성했다.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 된 후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을사5원흉 매국성토사건' 을 주도해 그 주모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으며 매국에 앞장선 일진회 일당 척결도 주장해 수 차례 투옥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살 되던해, 기미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종교단체들 중 유림대표들만 유일하게 3.1운동 참여를 거부하자 심산은 통탄속에 분개해 전국의 유림 대표들을 설득해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진정서'를 가지고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우송(郵送)한 후 김구가 이끌던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심산은 임시정부의 재정형편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 의정원의 높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직접 앞장선 용기있는 독립투사였다. 그의 왕성한 독립활동은 일제의 첩보망에 걸려 1927년 상해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5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상해 임시정부 때 부터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와 이승만의 친일 독재정권에 끝까지 반대해 이승만 정권과 투쟁했으며 1960년 박정희 군사정권때도 많은 유혹과 회유를 뿌리치고 끝까지 독재에 항거해 민주화 투쟁을 하였고 일제에 의한 심한 고문과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앉은뱅이로 여생을 힘들게 살다가 1962년 파란 많은 세상을 떠났다.

심산은 영남의 남인 유학자 의성김씨 명문 집안이다. 조선 선조 때 서애 유성룡의 깨대기 친구였던,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학봉 김성일의 집안이며 이조참판을 지낸 김우옹의 13대 장손이다.

심산은 글을 한 번만 보면 외워 버린 신동이었으나 공부보다는 의협심이 강해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며 소년시절 한 때 심하게 방황해 어머니 장씨부인의 간절한 충고로 공부에 매진해 당시 이름 높았던 대유학자요. 독립운동가였던 한계 이승희와 곽종석의 문하에서 학문을 깨우쳤다.
외아들인 심산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 김호림 선비 역시 대단한 노력과 결단을 보여 주었다.

1894년 동학 혁명이 일어날 무렵, 아버지 김호림은 강학당에서 공부하던 아들 김창숙과 학동들을 불러내어 농민들의 수고를 열변한 후 심산과 학동들에게 신분을 초월해 농사일에 참여시켰고 신분철폐령이 내려지자 노비들을 과감히 면천시켰으며 언제나 신분질서보다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중시하는 선비의 참모습을 아들 심산에게 보여 주었다.

심산의 학문적 계보는 영남 우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풍을 이어 받은 아버지 김호림과 실천궁행과 지행합일의 기치를 걸고, 한주학파를 일궈냈던 스승 한계 이승희와 곽종석 선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아버지 김호림은 양반으로 기득권을 포기한채 신분제도에 부정적 입장을 갖는 개화된 선진 유학자였으며, 스승 이승희와 곽종석은 만국평화회의 대표 이상설과 친분이 두터운 선비로 '의'를 실천하는 실천적 유학을 주창하며 항일운동에 앞장서는 등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학파의 성향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들이였다. 훗날 심산이 '행동하는 지식인' 으로서 의를 생명보다 중히 여겼던 그의 삶은, 성리학의 의리철학과 명문 의성김씨의 가풍과 스승 이승희와 곽종석의 가르침에 남명학파의 실천적 사상철학의 결실을 심산이 꽃을 피던 것이다.

심산의 독립운동의 거점은 대부분 중국의 상해였다.

김구보다 세살 년하인 심산은 임시정부 주석인 김구를 도와 임시정부 의정원 경북의원에 피선되었고 독립투사 박은식 선생과 함께 '사민일보'를 발행해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피력했고, 1921년 4월 19일에는 신채호, 김원봉 등 54인의 이름으로 '위임통치론'을 주장한 이승만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대통령이던 이승만 탄핵에 앞장 섰다.

그 후 심산은 북경에서 우당 이회영, 단재 신채호와 활발히 교류하며, 아나키즘운동도 전개하였으며 1921년 신채호와 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해 계몽운동도 펼쳤고,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보합단'에 참여하였으며 1922년에는 우당 이회영과 '일본정부성토문'도 발표하였다. 1926년 국내에 잠입해 독립 기지 개척자금을 모금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가 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과 부의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부산을 거쳐 대구로 압송된 뒤, 대구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김창숙은 끝내 입을 열기를 거절하며 한시(漢詩) 한 수를 지었는데, 시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 형사가 조선인에게 한시를 해석해줄 것을 부탁했고, 한시의 뜻을 해석한 일본인 형사는 고개를 숙이며 심산을 선생이라 부르며, 고문형을 완화시켜 주었다 한다.

또한 재판과정에서 국적을 묻는 일본인 판사에게 "나라가 망했으니 없다,"고 당당히 맞섰고 심산의 논리정연한 항변에 일본인 판사는 재판이 종결된 후 심산이 수감된 감옥에 찾아와 면회를 신청해 시국을 함께 논할 것을 부탁했으나 심산이 거절했고 문중과 가족들이 변호사 선임을 의논하였으나 '변호사를 선임한다는것은 일제의 존재를 인정하는짓' 이라고 과감히 거절하였으며 조선인 출신 변호사 김완섭이 세 번이나 면회를 왔으나 그 마저 거절 형을 언도받고 깨끗히 복역 하였다.
심산은 투옥되어 독립운동을 할수 없게 되자 김찬기 등 두 아들 마저 독립운동에 참여케 해 두 형제 모두 나라를 위해 순국 했다.

심산은 손문과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국민당 인사들과도 자주 접촉하면서 '한국독립후원회', '중한 호조회'(中韓互助會)를 조직, 중국 국민당과 연계투쟁을 시도했다. 아울러 망명중인 한국인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크게 관심을 갖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생활화 하도록 인재양성에 관심이 많았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침체되고 어렵게 되자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해 김원봉이 이끌었던 의열단 나석주 열사를 파견해 1926년 12월 일본의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을 기획한 열혈 무력
투쟁도 강행한 열사였다.

심산은 상대가 그 누구든지 의로운 자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은, 올곧은 너무도 대쪽같은 정치가였다.
상해 임시정부 때 함께 고락을 나누었던 백범 김구에게 조차도 친일파 청산에 백범이 불분명한 태도를 보이자 백범을 수 차례 질책하는 의연함을 보였고 남로당 당수 박헌영과 이승만을 민족의 반역자와 정치 모리배로 단정하고 철저히 배격했다.

선거철만 되면,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위해 손과 발이 되겠다고 온갖 거짖으로 떠들어 대다가 당선 후에는 코빼기도 뵈지 않은 채 염불보다는 잿밥에 혈안이 되어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서 정치노선도 하루 아침에 바꾸어 변절을 일삼는 일부 정치철새들과 소신도 비젼도 없이 정치를 꿈꾸는 신인 정치인들은 대쪽같은 선비정신에 나라와 민족만을 바라본채 지행합일의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준 심산 김창숙 선생의 평전을 수 십번 독파해 그의 위대한 삶의 족적들을 더 면밀히 살펴보고 답습한 후 정치일선에 나서길 소망한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