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출산에 반한 조선의 선비들 이야기

칼럼
월출산에 반한 조선의 선비들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3. 03.16(목) 13:49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월출산(月出山)'은 영암군의 남쪽에 있다. 신라때는 월나산(月奈山), 고려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리었다. 외화개산(外華盖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소금강산(小金江山)이라고도 하며 조계산(曺磎山으로도 불렀다.

월출산의 최고 정상은 천황봉(天皇峰)으로 높이가 809m다.
구정봉(九井峰)은 월출산을 대표하는 산봉우리다. 구정봉에 얽힌 구전설화는 많고 유행가 가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는 사람 하나가 드나들수 있는 통천문(通天門)이 있다.
이 통천문을 지나야 꼭대기에 오를수 있다. 통천문을 통과하면 2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제법 넓은 반석이 있다.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한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개가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했는데 도선국사의 디딜방아 설화속에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도 전한다. 동석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층암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그 무게는 비록 수 백명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영암(靈巖)'이라 칭했고, 영암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월출산은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지리산, 천관산, 내변산, 내장산과 더불어 호남 5대 명산이다.
산 전체가 단단한 암반이며 산세가 수려해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렀다. 주봉은 천황봉이며 장군봉, 사자봉, 구정봉, 향로봉 등이 연봉을 이룬다. 월출산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황사와 무위사,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가 있다.
'월출산 구정봉(九井峰)이 창검을 들고, 허공을 찌를 듯이 늘어섰는데. 천탑도 움직인다 어인 일인고, 아니나 다를세라 달이 오르네' 라고
노산 이은상이 월출산을 읊었고 국민가수 이미자는 '월출산 신령님께 소원 빌었네. 천왕봉 바라보며 사랑을 했네' 라고 `낭주골 처녀’를 노래해 히트 했다. 영암출신 가수 하춘화는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왕봉에 보름달이 뜬다.'라는 `영암 아리랑’을 불러 고향사랑을 표출했다.
월출산은 수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

고려시대 융셩한 농민시인 김극기가 월출산에 올라 월출산의 기기묘묘함을 '김거사집'에 생생하게 묘사했고, 조선 초기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도 찬탄의 싯귀를 남겼다. 무오사화때 부관참수된 점필재 김종직은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도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 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라고 월출산에 오른 그 감회를 읊었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삼족당 김대유도 영암과 해남 등 인근에 유배를 와 월출산에 올랐다 전한다.
특히 조선조 17세기 이후는 노론과 소론의 붕당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기로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쟁에 휘말리는것 보다는, 조용히 초야에 묻혀 풍류를 즐기는 삶을 더 추구했었다.

조선 후기 노론 계열 농암 김창협도 영암에 유배 중인 노론의 영수였던 그의 아버지 영의정 운곡 김수항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가 월출산 구정봉에 올랐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675년(숙종1) 7월에 월출산에 처음 올라 ‘월출산 구정봉기’를 남겼으니 총 215자의 '월출산 유산기'다. 월출산의 험준함과 기괴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고 그후 천리길을 마다 않고 김창협은 4차례나 월출산을 즐겨 찾았고 한다.

소론의 영수였던 미수 허목도 78세의 고령에 구정봉에 올랐다.

도교에 심취했던 허목은 월출산에 올라 유산기를 남겼다.
허목은 유산의 동선을 명확히 밝혔다. 허목의 유산 코스는 도갑사→용암사→구정봉→구절폭포→청정대→죽사를 거쳐 여정을 마친 기록의 ‘월악기’를 써 영암 윌출산이 한양 도성까지 남도의 명산으로 유명해지는데 크게 일조했다.
월출산의 최초 지명 월나악의 배경은 백제시대의 영암은 행정지명이 월나군이었다. 국행제의 큰 제사를 지내는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려 때는 '월생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성종 때는 '낭산'이라 칭했다.

도갑사 사적기에는 ‘구름이 항상 월출산의 제일 높은 곳에 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화개라 불렀다’고 월출산의 신비스러움을 기록했고 정상 봉우리에 구름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을 꽃에 비유하기도 했다.
​월출산에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로서 풍수지리의 도선비기로 유명한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 사찰 도갑사가 있다.
도갑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이 근처에서 보냈다고 한다.

도선(道詵, 827년 ~ 898년)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며 풍수지리설의 대가다. 그의 속성은 김(金)씨다.
15세에 승려가 되어 화엄사에서 공부해 득도했다. 그 후 수도행각에 나서다 혜철(惠撤) 대사를 찾아 소위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을 배워 깨닫고, 23세에 구계를 받았다.

도선은 운봉산에 굴을 파고 수도하고, 태백산에 움막을 치고 수도생활을 한 후 구례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수양했다.
제자들에게 "인연으로 와서 인연이 다하여 떠나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법랍을 마쳤다.
그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설은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과 고려의 건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왕건의 아버지에게 집터를 잡아주었다 전해진다.
도선은 중국에서 기원한 비보설(裨補說)을 주창해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이 크다.
도갑사는 1456년(세조 2)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에 공을 세운 신미대사와 친구사이인 수미대사가 중건하여 전부 966칸에 달하는 당우가 있었으며 부속 암자도 12개나 되었다고 한다.

1977년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당우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명부전, 미륵전, 국사전, 해탈문, 일주문 및 요사체인 세진당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월출산 입구의 해탈문은 조선 성종때 건립되었고 현판의 판액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를 걸었다가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교체했다. 해탈문을 지나 경내의 한 가운데 2층으로 된 누문을 두고 1층에는 좌우에 길게 여러 방을 만들어 종무소와 스님들의 참선처로 사용하고 2층에는 광제루가 자리잡고 있다.
광제루의 창건기록은 알수가 없다.
광제루 누각에 오르면, 월출산은 물론이요. 도량의 전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광제루 판액은 서호면 출신으로 2012년 왕인으로 선정된 한학자 김상회의 글씨란다. 이 광제루에서 매월당 김시습은 '남쪽 고을 그림 가운데 한 산이 있으니 달이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 고 월출산을 읊었다.

영암의 보고(寶庫) 월출산과 도갑사에 있는 광제루는 만물상 바위와 맑은 계곡물과 등근 보름달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이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래서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그들의 자취를 남긴 수많은 누정들을 곳곳에 영암땅 곳곳에 창건해 영암이 누정 위주의 예향(藝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되고 있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