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

기고
초원
  • 입력 : 2021. 06.10(목) 10:37
  • 영암일보
박석구 시인


초원



서쪽으로 난 우리 집 앞에는 배추밭이 있고, 조금 내려가면 논들이 있어 갓 심은 모들이 자라고 있고, 바로 그 너머엔 월출산 작수골에서 시작되어 마을 앞을 휘감아 도는 냇가가 있었다.

그 조그만 냇가에는 미꾸라지며 피라미, 붕어나 메기, 장어나 징거미, 가재 같은 민물고기가 늘 가득하였고, 우리가 냇가 둑을 지날 때면 참개구리들이 놀라 냇물 속으로 풍덩 도망을 가기도 했다. 거기에 물뱀이나 꽃뱀이 스르르 지나가다 풀밭으로 사라지며 우리를 놀래키기도 했다.

그 냇가 맞은편으로는 깔끄막이 가파르게 솟구쳐 있었고 그곳을 어린 내가 숨을 고르며 올라가면, 숨이 탁 트이게 드넓은 번덕지가 가득 오직 풀밭으로만 펼쳐져 있어, 봄날이면 항상 삐비 속을 까먹으러 올라가곤 했다. 거기엔 수많은 종달이가 땅에서 곧장 솟구쳐 삐리리 삐리리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울어예고, 가물거리는 아지랑이 속으로 무작정 달려가다 보면 천지가 온통 삐비로 넘쳐났다.

[그림=김덕남]

삐비를 뽑아 껍질을 벗기고 말랑말랑한 하얀 속살을 끄집어내어 입 속에 넣으면 약간은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쫄깃한 맛에, 어느 땐 껌처럼 씹어대기도 했다. 그래도 서운하면 우리들은 다시 종달이 나는 쪽으로 돌아와, 풀숲에 숨어있는 종달이 집을 찾아내 종달이 알을 몇 개씩 꺼내 먹곤 하였다.

그 삐비가 늦봄이 되면 줄기를 세우고 속살이 잎 껍질을 밀고 나와 들개 씨앗만한 씨를 열고 햇빛을 받다가, 여름이 오자 작은 억새 모양으로 하얗게 피면서 삐비꽃이 되어 하늘거리면, 그 새하얀 번덕지를 달리다가 눕거나 그걸 훑어 바람에 날리곤 했다.

그 번덕지 중앙에는 토성土城처럼 우뚝 솟아있는 방죽이었는데 -아마 일제 때 만들어졌고 비를 가두어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위를 줄달음쳐 올라서면 엄청난 참개구리들이 다이빙하듯 서둘러 물속으로 풍덩풍덩 들어가 커다란 눈만 내놓고 바라보는 모습에 재미를 붙여 수크령을 양쪽으로 잡아매어 두 발을 넣고 서로를 밀치는 놀이에 실증이 날 때면, 다시 방죽으로 올라가 개구리를 쫓곤 하였다.

그리고 번덕지가 끝나는 신작로 쪽으로, 도갑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죽정竹亭 마을 위쪽에 보堡를 막아 한 쪽 물길을 틀어 물길을 바꾸게 한, 상당히 넓은 수로가 번덕지 옆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거기엔, 아주 아주 오랜 기억으로, 초등학교를 가기 전 기억으로,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얕은 수로를 느릿느릿 따라오던 물은 물레방아를 거치면서 깊게 파인 수로로 갑자기 떨어지며 물레방아를 돌리고는 다시 느릿느릿 성양리 방죽으로 흘러들어 갔다.

우리는 여름이면 그 물레방아 밑에서 물을 맞거나 물장난을 하며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그 후, 그곳은 물레방아간이 없어지고 물레방아만 남더니 그나마도 어느 결에 없어지고, 몇 번의 수리작업을 거쳤으나 도갑사 저수지가 생기자, 지금은 마른 냇가로 남아있다.

내 동생 명순이와 손잡고 달음박질하던, 여름이면 방아깨비를 잡으려 폴짝폴짝 뛰어다녔던, 책보를 등에 매고 날마다 학교 가고 돌아오던 그곳. 방죽이 없어지고, 논이 생기고, 뜸부기가 울고, 또 논이 생기고, 뜸부기도 없어지고, 목장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지금은 한 치의 달릴 공간도 없어져버린 그 번덕지.

내 유일한 기억 속의 초원.

- 책 <추억의 사립문> 중에서




박석구 시인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2016년 광주 지송시회 8인 시 『연푸른 그늘에 앉아』 공저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