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전보에서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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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전보에서 다시 배운다
  • 입력 : 2021. 06.10(목) 11:22
  • 영암일보
▲ 나주 다시면에 소재한 삼봉의 적거지. 근래의 후학들이 추정한 곳에 옛 초옥의 모습으로 지어놓은 건물이다.

답전보(答田父), 아름다운 농부에게 답한다. 대답할答, 밭田, 남자미칭(아름답게 부름)父의 뜻으로 조선의 기초를 닦은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의 글이다. 그는 당시 회진현 소재동 거평부곡(현재, 나주 다시 운봉리)에 유배와 있었다. 대륙은 원이 기울며 주원장의 명(1368~1644)이 일어나고, 고려는 여진족과 왜의 침략으로 흔들리고 있던 시기다. 1375년 여름, 삼봉은 ‘친원반명’ 세력에 의해 개경권력에서 밀려나 이곳까지 온 것이다.

삼봉은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김을 매던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다. ‘노인장 수고하십니다.’ 머리는 희고 등에 진흙이 묻은 긴 눈썹을 가진 노익장의 턱이 끄덕이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대의 의복이 해지긴 했으나 옷자락이 길고 소매가 넓으며 행동이 의젓한 걸 보니 선비요, 수족에 굳은살이 없고 뺨이 복스러우며 배가 불룩한 걸 보니 벼슬아치 아닌가? 나는 도깨비, 물고기, 새우와 더불어 살지만 조정에서는 추방되지 않으면 오지 않는 거칠고 더운 땅인데 무슨 죄를 지었는가?

어찌 너의 입과 배를 채우고 처자만을 위해 좋은 마차와 집에서 ‘不顧不義(부고불의)’ 불의를 돌보지 않고, 욕심을 채우려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아니면 권신을 가까이하며 수레먼지와 말발굽 사이에서 남은 술과 식은 고기 조각이나 얻어먹으려고 어깨를 움츠리며 아첨을 떨다가, 형세가 바뀌며 이렇게 되었는가? ‘曰否(왈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경상(卿相)이 되어서 이리처럼 괴팍한 성질을 부리고 남의 말은 긍휼(矜恤)히 여기지 않으며, 아부는 들이면서도, 곧은 선비가 말을 거스르면 성을 내고 바른 도를 지키면 배격하며, 임금의 작록을 훔쳐 사사로이 만들고, 국가의 형전을 농단하다가, 악행이 여물어 이런 죄에 걸린 것인가? 삼봉은 그저 듣기만 했다. 노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한 마디가 옛 성현의 말씀과 같았다. ‘이런 곳에 저런 현자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사실 그곳 백성들은 어려울 땐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면서도 머리가 비는 것은 수치로 여겼을 정도로, 늘 책을 가까이하고 있었다. 삼봉은 위민의식과 민본사상을 키우며 무엇을 할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세 해를 보내고 유배에서 풀려나자, 삼각산 아래 삼봉재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1383년 함경도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러간다. 1388. 5월 위화도 회군, 1392. 6.25.(양력 8. 5.) 조선을 여는 기반이 된다.

노인의 백(魄)과 삼봉의 혼(魂)이 스며있는 그곳을 찾아간다. 원하는 민원(民願)이 원망의 민원(民怨)이 되게 한 적은 없었는지, 잠시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한 해전 앙상하던 초겨울 나뭇가지에는 녹음이, 작은 소로에도 들꽃이 피었다. 도올 선생의 ‘신소재동기’가 먼저이고 ‘소재동비’와 ‘나주정씨세장산’비가 서있다. 그 자락에 마루가 있는 두 칸 초사(草舍)가 보인다. 그런데 먼지가 끼고 자물쇠가 잠긴 채, 누구 다녀간 흔적조차 지워졌다.

삼봉이 실천을 모르는 지식인의 박학이 얼마나 무서운 허위인가를 깨달았던 곳이다.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가치가 있고, 조선 5백년 사상이 여문 곳인데도 그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다. 삼봉이 노인과 나눴던 대화와 정신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장으로 이용할 순 없을까? 2005년 가을, 도올은 이곳을 찾았다. 주민 생활상과 지명의 위치가 정확하게 비정(比定)되는 보기 드문 유적이요, 끊임없는 혁명의 샘물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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