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들의 영원한 오빠 백호 임제 이야기

기고
기생들의 영원한 오빠 백호 임제 이야기
심심풀이 우리역사
  • 입력 : 2021. 06.10(목) 11:33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광주문인협회 이사

교산 허균. 백호 임제. 구포동인 안민영을 조선의 3대 풍류 가객으로 꼽는다. 공통점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채 속세의 구속을 싫어하며 명산대찰을 유람, 시와 풍류를 즐기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기생과 염문을 뿌려 화제를 남겼다.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1549년 아버지 임진(林晉)과 어머니 남원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최고 염정시인으로 불리었으며 어려서는 외가인 곡성에서 자랐고 15살에 첫사랑 소녀와의 사랑을 노래한, ‘무어별’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시인의 극찬 속에 읊조림 되고 있다. 백호는 초서에 능했으며 검과 거문고와 피리를 항상 몸에 지닌 채 기행과 해학으로 가는 곳마다 주위의 시선을 끌었고 체구가 건장한 비만형 체질이였다.

자사의 중용을 800번이나 읽을 정도로 몰입형 독서광으로 두뇌가 명석해 스승 없이도 사서삼경을 혼자 독파하여 겁 없이 과거에 도전하다 몇 번이나 낙방거사가 된 후 큰 깨달음을 얻고 을사사화로 속리산 기슭에 낙향한 학자 성운의 문하가 되어 3년간 학문에 정진한 끝에 28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이어 알성시 을과 1위로 급제해 흥양현감, 병마평사, 관서도사, 예조정랑 등을 거처 왕의 교서를 담당하는 출세의 지름길인 청요직 정3품 홍문관 지제교에 올랐다. 서산대사 휴정, 영암 출신 삼당시인 옥봉 백광훈,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 구림이 외가인 조선 4대 명필 양사언과는 절친했다.

조부 임붕은 호조참의와 광주목사를 지냈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정암 조광조의 무죄를 상소했다가 조광조가 화순 능주에서 처형되자 나주목 회진리에 귀래정을 짓고 낙향했다. 숙부 임복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유배 후 귀래정을 재건해 영모정으로 개칭하고 은둔했다. 아버지 임진은 제주목사, 병마절도사를 지낸 청백리다. 미수 허목은 백호의 3번째 딸이 낳은 외손자로 우의정을 역임한 남인의 영수로 우암 송시열의 라이벌이었다.

▲ 나주 영모정

백호가 살던 당시 조선 조정은 동서 붕당의 정쟁이 심해 이전투구의 지경이었다. 백호는 벼슬에 염증을 느껴 꽃길을 버리고 외직인 평안도사를 자원했다.

부임길에 기생 황진이 묘소를 찾아가 한 잔술 묘지에 뿌리며,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방초 우거진 골에 시내는 울어댄다. 가대 무전이 어디 어디 어디메오. 석양에 물차는 제비야 네 다 알까 하노라.’
2수의 시를 읊다가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만 기찰에 걸려 파직되었다.

호탕, 호방한 기질의 백호는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그 역시 조부와 숙부처럼 나주 회진으로 낙향해 귀래정에서 ‘세상 사람들은 내가 입을 열면 미친놈이라 하고 입을 닫으면 바보라 하네.’라며 학문에 몰두했다.

백호는 호기심 많은 풍류남아였다. 평양기생 한우가 미색에 시문이 뛰어나고 지조가 굳다는 소문을 듣고 백호는 마침내 불길 같은 연정을 참지 못해 자존심이 강한 기생 한우를 찾아 ‘한우가’ 한 수를 띄웠다.

‘북창이 맑다해서 우산없이 길을 나서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한우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기생 한우는 즉석에서 시로서 화답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삼일로 얼어 자리. 비단이불 원앙베개 어디두고 얼어 자리 오늘 찬비 맞으셨다니 녹여드릴까 하노라.’라며 버선발로 맞이해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가죽신과 나막신을 짝짝이로 신고 거침없이 바깥나들이를 한, 조선의 쾌남아 나주 출신 백호는 기생들의 한과 설움을 해학과 풍류와 시로 달래주니 가는 곳마다 인기였다. 나주의 특산품 하얀 무명배 ‘새꼴나이’를 하인의 등에 한 짐 지운 후 기방을 찾으면 기생들은 쌍수를 들어 모셨다는 야사가 곳곳에 전해진다. 전국 명산을 주유하며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냈기에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자신의 분방, 호일한 기운을 북돋아 시에다 토해냈다”고 백사 이항복이 ‘백호집서’에서 임제를 평했다. “임백호는 기상이 호방하여 검속당하기를 싫어했다”고 ‘성호사설을 남긴 성호 이익도 백호의 성품을 평했다.

백호 임제는 자식들에게 “사해의 여러 나라가 황제를 일컬어 보지 않은 나라 없거늘 우리나라만 예로부터 그래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나라에 태어났거늘 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해할 것 있느냐 곡을 하지 말아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587년 고향인 나주목 회진리에서 3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가 죽은 후 ‘만약 고각을 세우고 단에 올라 맹주를 세워야 한다면 백호 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상촌 신흠은 백호를 추모했다.

백호는 700여 수의 시조를 비롯해 충신과 간신을 통해 현실을 풍자한 ‘수성지’, 식물을 통해 역사를 풍자한 ‘화사’, 단종을 찬양하고 세조를 조롱하는 ‘원생몽유록’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다. ‘백호집’과 ‘남명소승’을 문집으로 남겼다. 목포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국도 1호선의 나주 구진포에 임제가 시를 짓고 선비와 교류하던 영모정과 영걸산 중턱에 임제가 묻힌 묘지가 있어 지금도 시인 묵객들의 문학탐방 코스다. 쓸쓸함 감도는 백호의 묘지에서 그냥 갈 수 없어 혼자서 괜스레 중얼거려본다.

‘천하의 풍류남아 여기 누웠네.
사대부 체면따윈 훨훨 버리고
황진이 묘소찾아 잡초 뽑으며
한잔 술 시 한수로 넋을 달래던
백호의 환한 미소 너울거리네.
나주골 새꼴나이 한 짐지고서
한양땅 은근짜들 가슴 적시고
잡는손 뿌리치는 방랑거사로
조선의 자주성을 외쳐부르던
우렁찬 목소리가 귓전 울리네.’


▲ 백호 임제 선생 시비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윈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