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 정치인의 표상 낭산 김준연 선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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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정치인의 표상 낭산 김준연 선생 이야기
  • 입력 : 2021. 09.16(목) 14:03
  • 영암일보
낭산 김준연 선생은 1895년 3월 14일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서 향리 김상경과 청주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낭산의 태몽이 '낭산 집 앞의 큰 버드나무를 구렁이가 칭칭 감았는데 맨 꼭대기를 감지 못했다.' 는 아쉬움 담긴 뒷담이 전한다. 본관은 김해이며 가계는대를 이어 군청의 아전 생활을 하였다. 아버지 김상경은 6남 3녀의 9남매를 두었는데 그는 청주 한씨 소생 3형제 중 장남이었고, 3남 3녀는 배다른 동생들이었다. 아버지 김상경의 묘소는 금정면 남송리 선영에 낭산의 동생들과 함께 모셔있다. 엄격한 가정교육 탓에 낭산은 말수가 적고 허튼 소리나 유머감각이 별로 없었던것 같다.
6세 부터 월출산이 바라보이는 마을서당에 나가 한문을 배웠다. 그후 영암읍에서 10리 떨어진 송계리 영명재에서 통감부터 공부했고 당시 영암의 유학자 문명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 13세에 영암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문중의 주선으로 같은 마을에 살던 4년 연상의 김옥성과 결혼했다. 낭산은 일생을 아내와 해로한 당시 해외 엘리트 유학생들중 아주 보기드문 케이스였다.
1910년 2월 영암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으로 상경, 지금의 경기고등학교인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 7월 21일에 어머니 한씨가 사망하였다. 어머니를 여윈 후 한때 몹씨 방황하였으나 마음을 잡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한성고보 재학중 도쿄 제국 대학이 최고의 대학이라고 소개 받아 도쿄제국대학에 진학할 결심을 했다. 1914년 3월 경기공립고등보통학교를 전교6등으로 졸업하고 일으로 유학을 결심한다.
졸업식 날 일본인 교장 상전(上田)이 호출하였다. 상전 교장은 낭산에게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판임문관 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낭산은 꼭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해야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 법률을 공부하여 꼭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191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세이소쿠 영어학교의 3학년에 편입했다. 수업 진도를 따라 가지 못해 여러가지로 고생이 많았다. 동경제국대학에 다니는 목포출신 김우영이 그를 찾아와 '고등학교는 궂이 도쿄에서 다니지 말고 시골서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1914년 7월 일본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로 편입학하였다. 편입학 시험에서 그는 당초 불합격하였으나 그를 눈여겨본 일본인 선생의 특별 배려로 입학할 수 있었다. 1917년 가을 도쿄제국 대학 법학부 독법과에 입학했다. 학교공부도 열심히 했고 유학생 모임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문예활동은 물론 2.8독립선언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같은 호남출신 인촌 김성수.고하 송진우와는 유별나게 친했으며 이때 받은 김성수의 경제적 도움은 훗날 낭산의 정치활동에 큰 영향을 미쳐 크고 작은 오점들을 남기기도 했다.
1920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해 1921년 도쿄 대학 대학원 정치학과 조수가 되었지만 더 공부가 하고 싶어 1922년 독일에 유학, 베를린 대학 법과에서 정치 법률학을 연구했다.
이때 사귄 친구가 후일 독일 대통령이 된 하인리 리뷔케 이다.
1925년 영국의 런던을 거쳐 귀국, 그 해에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 사정을 시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특파원이 되었던 것이다. 1927년 보성 전문 학교 강사를 거쳐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시, 제3차 공산당 사건(ML당)에 관련하여 7년간 복역하고, 1934년 동아일보사 주필이 되었다.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에 관련하여 사임, 전곡에서 해동농장을 관리하기도 했다.
해방 후 오랜 친구인 송진우와 함께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하고, 1946년 입법 의원에 피선, 한민당 상무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48년 영암에서 민의원에 당선. 헌법 기초 위원.1949년 민주 국민당 상임 상무 위원을 역임하고, 1950년 법무부 장관에 취임. 1951년 대일 강화 조약 초안 심사위원이 되었다. 1953년 민주 국민당 상무 집행위원. 1954년 제3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 1955년 동아일보사 중역.민주당 상무 의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선, 유엔 한국 대표.1957년 미국.유럽.아시아 각국을 방문, 이해에 민주당을 탈당한 후, 통일당을 조직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제 4대 민의원 의원에 피선.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 1963년 자유 민주당 대표 최고 위원, 동년 6대 국회 의원에 피선되고, 민중당 고문이 되었다가 신민당에 참가했으나 사망했다. 민의원에서 대통령까지 꿈을 꿨으나 낭산의 삶은 유달리 영욕과 부침이 심했다.
무엇보다도 낭산은 더러운 재물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일제가 패망하여 경기도 도지사 관사를 그냥 주겠다는 제휴도 과감히 거절했으며 반민특위 위원으로 적산가옥 등 치부의 기회와 장관과 민의원을 몇차례 지냈으나 변변찮은 집한채 없이 1971년 12월31일 세상을 떠날때는 회중시계 하나와 단돈 200원이 수중에 있었다니 한국 근대 정치사에서 이보다 더 깨끗한 정치인이 누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글쓴이
월봉 김오준 시인 금정면 출생 / 광주문인협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