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절된 영암의 근대사 이야기

기고
굴절된 영암의 근대사 이야기
  • 입력 : 2021. 10.14(목) 18:54
  • 영암일보
김오준 광주문인협회 이사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된 후 1945년 8월15일 일제 강점기에서 우리 나라가 해방된지 76년이 지났다. 차제에 굴절된 우리 고향 영암의 근대사를 대충이나마 더듬고자 한다.
그 서슬퍼런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우리 영암 출신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 운동. 3·1기미만세사건 .광주항일학생사건. 소작쟁의. 광복군. 언론 활동을 통한 대일항쟁 의식 고취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먼저 의병운동은 1894년 12월 장흥석대들에서 동학군의 마지막 전투가 비참하게 막을내리자 해산된 동학군들은 만주 등 해외로 피신커나 국내에 은신해 기회를 엿보았다.
동학혁명은 음으로 양으로 조선의 뜻있는 유생들과 민초들에게 일제에게 항거하는 길이 가장 의로운 일이라고 설파했다. 동학혁명 주력군의 구성이 전라도 백성들이 90%를 차지했다 하니 그 위세가 짐작이 간다.
이에 1905년 장성 선비 노사 기정진의 창의문을 접한 구림유생 최병손 선비를 구심점을 이룬 을사의병으로 부터 출발해 1907년 정미의병은 최고점을 찍는데 영암출신은 의병장 박평남.박민홍.신예교.김선중에 여성 최초의병 양방매 등 200여명에 이르렀고 금정면 국사봉에 '호남의소'의 본진을 두고 600여명 의병이 국사봉 부근의 접경지에서 23회나 일제와 전투를 벌려 그 기세를 떨치며 일제의 전라도대토벌작전의 큰 희생을 감수하며 끝까지 항전했다.
영암군 금정면은 의병장급 7명에 48명이 의병에 참여한, 면단위로는 전국 최고로 의병이 많은 의향으로 떠올라 방송과 신문의 취재가 이어지고 있다.
1919년 3·1만세사건은 4월 10일 영암 장날을 기해 조극환, 김재홍,박규상,박흔홍,정학순,조병식.조희도,최기준,최성심,정상조,김영언 등이 주동이 되어 시위를 했었다.
이후 낭산 김준연은 조선일보 특파원.동아 일보 주필로 언론을 통해 우리 민족정신을 깨우쳤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때는 영암출신 박인배.이상철.이춘수 등이 적극 가담, 학생 비밀 결사 또는 야학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 했고 이후 이들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영보야학은 1932년 '영보형제봉사건'의 정신적 근원지였다.
그 이전 영암읍 열무정은 영암독립운동 비밀회의소 역할을 해 1919년 3·1운동 때 조극환 등이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장소였고 최민섭, 박규상, 정학순, 김민규, 김학용, 김봉규, 김상조 등은 봉산 밀림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4월 봉기를 결의, 10일 아침 유인물을 집집마다 투입, 구림대동계 광장에 집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영암 경찰서까지 시위를 했다.
1932년 5월1일 영보 형제봉 사건은 70여명이 가담했고 주동자는 신용주.신용점.신일선(신용호 형) 형제. 유혁이였으며 가담자는 최영렬.최병수.최동림.최경환 등이다
우리 영암의 민족운동의 뿌리는 조선 문종때 낙향해 후학을 바르게 양성한,
연촌 최덕지의 존양사라 여겨진다.
계유정난의 잘못된 역사를 학문으로 항거한 선비정신이 후새에 배어들어 의로움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영보 전주 최씨 연촌 최덕지. 노송리 거창신씨 영계 신희남. 신북 모산리 문화류씨 류관 후손들은 혈연.학연으로 얽혀진 소론계열로 영암지방 사상형성의 구심점이였으며 영보의 영보계와 구림의 대동계가 행동의 전위대 역할에 면암 최익현이 귀양길에 드나들었던 덕진면 운암리 설락제에서는 척왜의식의 씨앗을 뿌렸으니 그 학문적 기저는 화서학파요. 면암 최익현과 장성 선비 노사 기정진의 학문적 영향력이 크게 미쳐 한말 전라도의병을 영암출신들이 주도했다.
훗날 구림.모산.영보 등 반촌의 신학문을 공부한 엘리트들은 그 당시 각광을 받았던 레닌의 사회주의사상이 일제로부터 벗어나는 독립의 수단이라는 판단하에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해방 후 맥아더의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악랄했던 친일 경찰 등 친일파 정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아 6.25 남북전쟁때 사회주의에 물들었던 이봉천.황점택.최병수 등 일부가 빨치산이 되어 좌우대립으로 영암의 희생자는 수 만명이 되었다.
신북의 모산리. 군서의 구림리. 덕진의 영보리는 '영암의 작은 모스크바' 라고 불리울 정도로 사회주의운동에 물든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양반가의 자녀들로 유학을 해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그들에 의한 영향은 625남북 전쟁때 1950년 7월20일 300명이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던 금정면 연소리 덤재의 '보도연맹학살사건'에다 1950년 10월 17일 90명이 희생된 '구림학살사건', 1950년 12월18일 170여명이 죽은 금정면 연보리 '냉천양민학살사건'으로 이어진 쓰라린 비극을 연출해야만 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독립운동을 하고서도 한때 사회주의에 물들었댜는 이유로 북한 공산당으로 몰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선열들이 너무 많은 고장이 우리 영암으로 후세에 사는 후손들과 관계기관에서 해결해야할 큰 과제다.
지리환경적 영항으로는 영암이 한양에서 제주에 이르는 조선시대 국도 1호선인 청암역도의 길목에 위치해 한양을 오가는 관리들이나 나그네들에게 정보를 쉽게 얻을수 있었기에 세상 돌아가는 흐름과 사리 판단을 그나마 빨리 할수 있었던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추론해본다.



[저자약력]
다산학회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