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지리산 빨치산들의 최후

기고
6.25전쟁과 지리산 빨치산들의 최후
  • 입력 : 2021. 10.18(월) 07:26
  • 영암일보
김오준 광주문인협회 이사
북한의 김일성은 1950년 남북전쟁을 준비키 위해 남로당 박헌영과 함께 1949년 소련과 중국을 1차례씩 방문해 무력통일을 위한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한편으로는 황해도에 6개월 코스의 금강정치학원을 설립해 남로당 출신 당원 1500명을 뽑아 유격투쟁의 핵심요원으로 양성해 조직적인 빨치산 투쟁과 남한에서의 인민봉기와 내응을 기도하는 등 무모한 무력 침략전쟁을 결행했다.
미국의 허치슨라인 설정과 정보당국의 북한에 대한 오판도 전쟁발발 요인의 하나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강원도 오대산에 빨치산 제1병단,
전라.충청.경상도의 접경지역인 지리산에 제2병단, 태백산에는 제3병단을 구축했다.
병단이란,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야전군 사단병력과 비슷한 규모의 병력단위로 게릴라 전술위주의 군부대를 칭한다.
이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지리산 지구의 제2병단은 4개 연대의 조직을 두었는데 조직의 체계가 복잡한데다 자료가 빈약해 아쉬움도 컸다.
제2병단 지리산지구 빨치산활동에 대한 김일성의 이중적 감시 체제에다 직책의 변동.인민재판.소환.복권 등 상하관계 설정이 명확하지 못한 지휘계통은 내부에 큰 혼선과 무질서를 가져왔다.

2병단 지리산 지구 빨치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로는 충청도 금산 출신 이현상과 전라도 보성의 박영발과 김선우다.
이들은 모두 남로당 전남 도당위원장을 지낸자들로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하기 전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한 전력에다 해방이 되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친일파 청산 미흡에 큰 불만을 가진 사회주의 사상에 젖여든 이론가들이였다.
당시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들로 남로당 내에서는 꽤 인품과 신망을 받기도 했던것 같다.
제주 4.3사건을 주도한 김달삼 같은 남로당 핵심 당원들은, 이승만의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한 세력들과 여순사건으로
지리산에 입산했던 김지회.홍순석.지창수.이영희.등 젊은 군인들이 합세해 투쟁을 주도했다.

지리산 빨치산의 조직 구성원으로 최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김일성과 호형호제했다는 현재 북한 국방위원인 최룡해의 아버지 최현과 동명이인으로
1949년 화순 화학산에서 사살되었다.
이현상이 활동하기 이전의 지리산 지구 빨치산 총책으로 추정되나 활동기록은 찾기가 힘들다.
다음으로는 전설적인 빨치산 영웅 이현상의 출현이다.
1905년 9월 27일, 충남 금산에서 출생으로 부농에 면장을 지낸 가정의 서자출신으로 서울 중앙고보 재학때 부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7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수재였고 달변가였다.
남로당에서 연락부장, 노동부장을 하던 중,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되자 월북하였다가, 김일성의 명을 받고 1948년 다시 남한으로 내려와 여수 14연대 여순사건을 배후에서 주도했다.
이후 이현상은 부하들을 이끌고 다시 북한으로 가다가, 6.25남북전쟁이 발발 남하명령을 받아,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상황이 매우 불리해지자 북으로 후퇴하던 중, 당의 지령을 받고 남하하여 또 다시 지리산으로 입산해 1951년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그의 운명자체가 중앙당의 요직을 한 번도 차지하지 못한, 빨치산이 전부였다.
이현상의 활동으로 지리산은 ‘빨치산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세력과 규모가 대단했으며,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은 빨치산들에게 전설속의 영웅적 존재였으나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쌍계사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이현상이 한창 활동한 같은 시기에 평양 금강정치학원을 수료한 보성 출신 박영발이 등장한다.
박영발은 김일성으로부터 남한정부 전복의 밀명을 받고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을 임명받고 지하에서 꾸준히 활동하다가 라이벌인 이현상 숙청작업에 앞장선 공로로 5지구당 상임부위원장으로 영전했으나 1954년 지리산 뱀사골에서 국군 35연대 수색대가 추격해오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 뒤를 이어 보성 웅치출신 전남도당위원장 김선우가 총책이 되었다.
김선우는 일제강점기부터 철도노조의 노동운동을 주도한 투쟁경력을 가진, 부하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제법 인품이 갖춰진 인물로 평가되었다.
1954년 4월5일 백운산 서골에서 추격이 가까워지자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뒤를 이어 전남도당 부위원장 박갑철이 지리산 지구 잔여 남로당을 이끌었으나 1955년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어 2병단의 빨치산 조직은 완전히 무너졌다.

2병단의 관할지역이었던 영암은 인민군 정규군의 제2군단장 무정이 이끄는 에하부대로 인민군 최정예부대인, 영웅칭호를 두 번이나 받은 6사단(사단장 방호산)15보병연대가 1950년 7월 24일에 영암에 진입,남로당들이 발호가 시작되었다.
14연대가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기 전까지 암약하던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과 지리산지구 사령관 김선우와 지리산 유격 총본부장 김백수의 지휘 아래 영암은 빨치산의 세상이 되었다. 인민유격대 제3지구사령관을 황점택이 맡았고 유격대장은 이방휴, 부대장은 김영우가 민청년대장 한일수가 완장을 차고 영암 읍내와 월출산 일대에서 발호하기 시작했다.
영암의 공산당은 이봉천이 조직을 처음 주도했다고 하나 그 기록은 없다.
이봉천은 월출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다가 도당간부로 소환된후 그 종적이 보이질 않는다.
황점택은 일제강점기때 영암면사무소에 걸어진 일장기를 훼손해 체포된후 투옥되었고 이때 이봉천에 의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영암군 초대 인민위원장은 최규동이 내무서장은 최병수가 군당위원장은 황점택이 차지했으나
1950년 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괴 인민군의 퇴로가 차단되자 이들은 지리산의 한 루투인 해발 614미터의 금정 국사봉으로 10월 1일 입산하였다.
1951년 2월 20일 함평 불갑산 유격대가 합세해 빨치산의 숫자는 1000명에 이르렀다 .
빨치산들의 가족들까지 모여들어 한때는 그 숫자가 만명 가까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1951년 3월 24일 지리산 빨치산의 주력부대 남해여단이 전멸하고 1951년 4월까지 국군과 경찰에 의해 토벌이 될때 까지 국사봉의 접경지역에서는 좌익과 우익이라는 죄명으로 피아간에 희생된 사망자의 수를 정확히 파악키 어렵고, 경찰과 국군에 의해 희생된 사망자가 7125명이 희생되어 유족회에서는 명예회복과 보상을 정부에 현재까지도 요구하고 있다.

아무튼 빨치산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며 지리산과 그 근거지로 루트를 삼아 세력을 규합하고, 군경과 민간인들에게 많은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를 준채 1954년 토벌까지 6년 동안 1만 회가 넘는 교전을 벌였고, 죽은 자도 2만이 넘는다고하나 확실치는 않다.
지리산 지구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것은 1963년 11월 12일 새벽 경상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내원사 계곡이다.
빨치산들은 무모한 유격 투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이미 남한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북한 김일성에게 인정 받고 세상을 바꾸려했으나 김일성은 빨치산을 전쟁을 위한 소모품에 보조적 존재로만 여겼기에 결국은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아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슬픈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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