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 나다

기고
나는 곧 나다
  • 입력 : 2021. 11.18(목) 10:47
  • 영암일보
목포산돌교회 김종수 목사
 구약성서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애굽(이집트)을 탈출하는 히브리 노예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영어로 엑소도스(Exodos)인데 원래는 그리스 말로 ‘~로부터’라는 전치사 ‘에크’와 길을 뜻하는 ‘호도스’라는 명사의 결합니다. ‘길을 벗어나다’는 뜻입니다. 출애굽은 노예의 길을 벗어나 주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나온 후 광야 40년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라는 사람이 양을 치다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때 모세는 이 사명 앞에 주저하며 이집트의 노예로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을 보낸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모세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곧 나다”였습니다.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고 하는 분이 보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 하십니다. 여기 ‘나’가 ‘에흐예’인데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개역성경에 의하면 여호와)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라고, 왜 ‘나’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 이름과 출애굽 해방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이름은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주며 알려주신 이름입니다. 노예는 ‘나’일 수 없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나’입니다. 노예에게 나의 생각, 나의 뜻이란 없습니다. 

사실 성서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은 ‘나’ 야웨입니다. 신앙은 아니 삶은 ‘나’되기이기 때문입니다. 주체적인 나를 이루는 것, 이것이 진정한 해방입니다.

그런데 “나는 곧 나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하면 그런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아침의 ‘나’가 다르고 점심, 저녁의 ‘나’가 다릅니다. 때마다 다른 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는 곧 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은 “나는 곧 나다” 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나는 곧 나다”할 수 있는 ‘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물론 이 ‘나’는 나다운 나입니다. 사람다운 나입니다. 먼저 모세는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세의 정체성, ‘나’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원래 히브리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서에 의하면 히브리인의 수가 늘어나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아기 모세를 숨겨 키우던 누이와 어머니는 아기를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았고 이를 본 파라오의 딸이 히브리 아이임을 알면서도 데려다가 기르게 됩니다. 공주는 아이 이름을 ‘물에서 건졌다’는 뜻의 모세라고 짓습니다. 물론 이집트식 이름입니다. 모세는 40년을 이집트 왕궁에서 이집트인으로 자랍니다.

모세는 어느 날 자기 동족이 이집트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다음 날 또 동족인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게 되는데, 그 때 때리고 있던 사람이 웬 참견이냐며 어제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며 대들자 모세는 자신이 살인한 것이 탄로난 것을 알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칩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히브리인도 이집트인도 아닌 사람이 됩니다. 정체성이 모호한 경계인으로 말입니다. 내가 곧 내가 아닙니다. 미디안에서 그는 아내를 만나 40년 목동생활을 합니다. 어느새 팔십이 되었습니다. 이젠 그 ‘나’는 미디안 사람으로 익숙해져 모호한 나, 나 없는 나로 살아갑니다.

 그런 그를 ‘나’라고 하는 하나님이 불러 노예로 있는 동족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모세에게 히브리인은 잊혀진 백성이고 잊혀진 자기 정체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불러 그의 ‘나다움’을 찾아주십니다. 그로서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일곱 번이나 거절하기도 합니다. ‘나’를 찾는 일이 이렇게 쉽지 않습니다.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400년 노예 생활을 했으니 이제는 노예가 운명, 팔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40년 광야의 길을 갑니다. 노예의식에서 주인의식으로 나의 나다움을 찾는 길없는 길의 광야를 말입니다.

사실 ‘히브리’라는 민족의 이름은 우리가 생각하듯 혈연적인 민족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말의 어원은 ‘하삐루’입니다. 그 뜻은 ‘말구종’, ‘먼지’, ‘부랑자’, ‘잡동사니’라는 뜻입니다. 그저 이집트 주위에 떠도는 하층의 민중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이집트의 노예가 되었기에 히브리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지금처럼 배타적인 혈연, 민족으로 무자비하게 다른 나라 백성을 죽이는 전쟁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킵니다. 이집트 파라오에게 요구하라고 한 해방의 내용은 “광야 사흘 길을 걸어가서 야웨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광야’, 공간의 독립입니다. ‘사흘 길’, 시간의 독립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인간 파라오의 지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빈손으로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당히 은붙이와 금붙이와 의복을 달라고 하여 아들 딸들을 치장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주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노예 노동의 대가입니다. 경제적 독립입니다. 그제서야 ‘야웨’, 나다운 나, 사람다운 내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의 독립, 이 나가 모인 우리의 독립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이름은 인간 독재가 파라오가 아니라 ‘하나님(엘)이 다스린다(이스라)’는 뜻의 ‘이스라엘’입니다. 전세계는 잡동사니입니다. 서로의 문화와 역사가 다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주체성을 가지고 다른 이의 주체성을 인정해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세를 처음 만난 하나님은 자신을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나의 조상의 하나님, 곧 세종대왕의 하나님, 이순신의 하나님, 유관순의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찾는 것, 그 주체적인 내가 모여 우리를 찾는 것이 참 신앙이고 참 삶입니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보았습니다. 

지난 10월에는 73주년 여순민중항쟁이 있었습니다. 제주의 자기 백성을 권력을 위한 이념 몰이로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한 14연대의 항명의 사건입니다. 미군정 하에서 친일세력들이 일으킨 반공몰이에 맞서 나의 나됨, 우리의 우리 됨을 찾기 위한 의거였습니다. 여순사건으로 2만 명 이상이 빨갱이로 몰려 처형됐습니다. 획일화된 거짓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 광기에 합류한 서북청년단은 잔혹하게 제주와 여수, 순천 등 남도의 양민을 학살했습니다. 부끄러운 기독교 교회의 흑역사임에도 신사참배와 함께 공식적인 사과 한 마디가 없습니다.

우리 비극적인 근현대사 뒤에는 언제나, 지금까지 미국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백인이라도 된 듯 성조기를 휘날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방 76년인데 아직도 파라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의 명령을 기다려야 합니다. 일본 수상에게 미안하다며 일장기를 흔들어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이스라엘 기 밑에 모이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나의 나 됨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이라도 “나는 곧 나다”라고 언제나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직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우린 여전히 일제 하에 있고 미군정 하에 있고 청산되지 못한 친일 유신군부독재 밑에 있습니다. 180석을 몰아 주어도 쓰레기 같은 고물 국가보안법 하나 폐기시키지 못합니다. 어떤 불의도 청산하지 못합니다. 여순 항쟁을 비롯한 수많은 학살의 사건에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살인마 독재자들이 죽어도 국가장으로 거창하게 치룹니다. 

도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입니까? 하긴 세월호 참사 하나 처리못하는 이 정부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나요? 내가 없고 우리가 없습니다. “나는 곧 나다”를 말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것일까요? 다시 기계가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 나다운 나로 살고 싶다는 전태일 열사의 11월입니다. 아직도 자기를 태워야 비로소 나는 곧 나일까요?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