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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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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사랑의 방명록’
  • 입력 : 2022. 01.06(목) 17:09
  • 영암일보
박석구
시인
N! 참으로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30년을 훌쩍 넘어 창백한 낯의 너무나 마른 그대를 만났을 때, 그대 모습이 그대의 젊은 시절과 겹치면서 내게 돌아오는 것은 안쓰러움을 넘어선 슬픔이었습니다.

나만이 몇 개월 동안 그대를 무작정 좋아했던 젊은 시절이 차라리 안도감으로 다가오고, 철없던 열정만 가득한 편지를 그대 방이 있는 담장으로 던지고 돌아섰던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대가 유방암으로 한 쪽 가슴을 떼어냈다고 브래지어 한 쪽을 누르며 희미하게 웃었을 때, 솔직히 그 시절엔 그대 가슴에 대한 욕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대의 바랜 듯한 맑은 웃음이 있는 그대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이 내 욕망의 전부였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안 아픈 이별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이후 지금까지 그대를 거의 잊고 살아왔음을 인정합니다. 닿을 수 없는 다른 이에게 나는 다시 휩쓸려갔고, 나의 절실한 표현에도 그대가 보인 멍멍하고 무관심한 모습에 젊은 날, 파닥거리는 나의 호기와 변덕들이 그대만을 바라보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막막하여 상심과 포기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겨울, 세한도처럼 흩뿌리는 가루눈이 시린 바람에 쓸려가고 있었던 그 버거운 지리산행이, 내 가슴 속에 아프게 울렁이는 그대 생각을 지우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어이 먼 세월을 돌아와서 희미한 옛 모습을 보이며, 가늘고 긴 그대의 창백하고 하얀 손을 내 손등에 얹으며 “너를 그때 속으로 좋아했었어. 네가 다시 올까 많이 기다렸는데” 하는 말을 하여야 했습니까. 그대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모든, 내가 애태웠던 순수한 추억들이 머릿속으로 새벽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그 말을 듣자마자 하얀 벽이 되어 그저 멍하니 한참이나 그대를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해야만 하였습니까. 그리고 서서히 아파오다 비로소 가라앉아 가는 내 가슴에, 내가 그렇게도 곱게 품었던 아쉬운 사랑이, 눈치도 못 챈 못난 사랑이 되어버리는 그런 말을 이제야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왜 점점 기뻐지는지.

N! 초하루 삭망으로 다시 그대를 만났을 때, “오늘 비가 오네. 네가 우산도 안 쓰고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우리 집 앞에서 나를 부른 적이 있었어”하며 노래방에서 손을 잡고 김세환의 <비>를 부르면서 가벼운 춤을 잠시 추었던 생각이 납니까?

밀려갔던 것과 밀려오는 것이 동시에 내 머리 속에서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때야 나는 그대의 눈, 코, 입, 귀, 목, 머리칼, 앙상한 빗장뼈, 모든 표정과 모든 숨소리와 모든 스쳐가는 내음, 모든 움직임, 다시는 만질 수 없는 그대의 손과 허리를 자세히 보며 느껴갔습니다.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던, 그대의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던 그때의 그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고, 만지지 못했던 것과 만져져서 느끼는 그 순간이 같은 아픔으로 다가오고, 애탔던 그때와 애타지 않는 지금이 같은 기쁨이구나,라고 느끼게 되고, 젊었던 그대와 지금의 그대가 같다는 것이 비로소 내 원형의 눈동자 속에 비추어졌습니다. 가슴속에서 늦게야 치밀어 오르는 눈물에 자꾸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알고 있었나요.

기별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문득 생각나는 이 기억이 자주 만나 퇴색이 되고, 서로의 몸짓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하는때 늦은 후회보다, 이대로가 봄비에 씻긴 산수유 꽃처럼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삶의 한 그림으로 간직될 테니까요.

그 겨울은 너무 추었고 그 후 여러 해가 갔습니다. 세월은 너무 많은 것을 잃게 하는데,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밤을 새울 수 있게 하던 시절이 또 언제였던가를 기억나게 하는, 이 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여정 잘 사십시오.

[약력]
저자 박석구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