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진정한 군인 정강 장군 이야기

기고
대한민국의 진정한 군인 정강 장군 이야기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1.20(목) 17:03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3.19 대선을 앞두고 소신도 비전도 없는 정치 철새들이 출세의 기회를 잡겠다며 온갖 비리를 저질러 몸담았던 정당에서 쫓겨나 근신은커녕 옛 동지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명분 없는 기자회견으로 새 주군에게 충성맹약을 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구역질이 난다.

가방끈을 앞세운, 배경지식 옅은 짧은 식견으로 패널로서 떠들며 스타나 된 것처럼 우쭐대다 갑자기 특보라는 직함 속에 한자리 탐이 나 변신했다는 속마음은 감춘 채 괘변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에 더욱 분노가 치민다. 이런 구차한 모습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오직 한길, 군인의 삶을 살다 비명으로 사라진 대한민국의 참 군인 정강 장군을 소개한다.

6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한국군 수뇌부는 2군 사령부 부사령관 소장 박정희 장군과 장교 250명이 이끄는 3500명의 무력 쿠데타군을 진압하기 위해 5월 16일 21시를 기해서 육군 제8보병사단의 3개 연대가 진압을 위하여 출동 준비를 마쳤고 육군 제6군단 역시 반란군 진압에 동참키로 했었다. 당시 6군단은 김웅수 소장이, 8사단은 정강 준장이 지휘하였는데 이미 진압 준비는 끝났고 장면 총리 및 장도영 장군의 재가가 있었다면 쿠데타군을 충분히 서울에서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은, 5월 16일 제1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은 장면 정부에 대한 지지를 밝히며 무력 진압을 주장했으나 혁명군의 회유로 중립으로 돌아섰으며 제30사단장 이상국 준장은 급하게 4개 소대 규모의 진압군을 구성,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6관 구 사령관 서종철 소장 역시 참모총장 명령이 아니어도 자신의 명령 없이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지시함으로써 꽤 규모 있는 진압군이 구성되나 싶었으나 아프간의 무능한 가니 대통령처럼 국가 수뇌부인 장면 총리의 도피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의 이중 플레이는 초기 진압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채, 지휘라인이 무너져 진압 명령을 내리지 않고 숨거나 즉답을 회피했으며 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이 쿠데타군과 서로 연결이 되어서 진압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쿠데타군에 참가한 고위 지휘관들은 주로 육사 5기생이 중심이었는데, 서 북계 평안도 출신인 이들은 박정희보다는 장도영을 따르는 인물들이었다. 이 흐름을 간파한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이뤄진 쿠데타 주역들은 장도영 장군을 허수아비로 내 세웠고 이에 속은 장도영 장군은 육군참모총장 명령으로 강력한 진압 의사를 밝혔다면 혁명군들은 스스로 붕괴되거나 진압되었을 텐데 권력에 눈이 어두워 결국 혁명군의 꾀에 넘어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며, 제1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도 매그루더 주한 미 8군 사령관의 성명을 읽은 뒤 자신은 대한민국 정부의 명령에 복종한다며 자신의 예하 부대들이 반란 진압을 위해 동원된다면 다수의 부대 들이 참가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으나 결국은 혁명군을 방조했다. 제2 야전군 사령관인 최경록 장군 역시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여기에 미국의 군사고문 하우스만 대위의 불분명한 태도와 참모총장 장도영 등 군 수뇌부들의 이중 플레이는 혼돈 속에 혁명군의 동조 세력으로 전락해버렸다.

뒤늦게 밝혀진 미국의 비밀문서에 기인할 때, 다수의 한국군 장성들은 쿠데타 진압에 동참하거나 혹은 관망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의외로 5.16 쿠데타는 혁명군 3600명이 참여한 굉장히 엉성한 계획으로 충분히 진압이 가능했으나 우물쭈물 망설이다 진압의 골든타임을 상실했다.

5.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고 혁명군 주도 세력에 의해 허수아비로 이용만 당한 장도영 외 몇몇 장군들은 반혁명죄로 몰려 옥살이를 했고, 혁명을 지지하기만 좋은 자리를 보장한다고 회유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만기 출소한 장군이 바로 6군단 8사단장 정강 장군이다.

정강 장군은 박정희와 육사 동기생으로 5.16 당시 반란군을 치려고 시도했던 장군이다. 그는 박정희의 반란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진압하려 휘하부대를 소집하는 등, 반란군을 대항했다는 이유로 혁명재판에서 가장 긴 형량을 받았으며 박정희와는 잘 아는 사이였으나 사적 감정보다는 군인정신을 중시해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참군인이었다. 출옥 후 온갖 스트레스로 인해 한창나이 45세에 위암으로 투병 중 박정희가 치료비에 보태라고 보내온 봉투를 집어 던지며 "반란군 놈의 돈은 받을 수 없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치료를 거부하며 완쾌되지 못한 채 울분의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한 많은 군인의 외로운 삶을 마감했다. 현충원 국립묘지의 장군묘역에 박정희와는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잠들고 계신다는데, 이승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난 정강 장군은 무슨 말을 했을지 사뭇 궁금하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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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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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역문학회 이사
영암일보 논설주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