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김 공동체

기고
씻김 공동체
  • 입력 : 2022. 04.22(금) 12:52
  • 영암일보
김종수
목포산들교회 목사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한복음 13:12~17)


예수님은 잡히기 전 최후의 만찬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교회는 이것을 세족식이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장면인데 이것을 ‘세족식’이라고 부르는 것을 요한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에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예식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나 ‘세례’라는 명사형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세례주다’라는 동사형이 있는데 이것을 ‘세례주다’로 번역하기 보다는 ‘씻어주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요한의 신앙에 적합한 것 같다. 더욱이 4개의 복음서 전체에서도 에수님이 세례를 주셨다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3장 22절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세례를 주신 기록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4장 2절은 ‘에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세례를 주시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특히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지도 주지도 않으셨을까? 나아가 요한복음에는 ‘복음’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 왜 그럴까? 요한은 세례니 복음이니 하는 의식이나 말을 피한다. 그것은 삶으로 답변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 세례란 그 분의 삶과 말씀이었다.

바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에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을 보아야 한다. 당시 노예의 임무엿던 발 씻어주는 일을 예수님 자신이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주 혹은 선생이라고 부르는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이것이 사랑의 기준이다. 제멋대로, 제 기준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리스도다.

발은 몸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다. 더러운 곳을 씻어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세례의 삶일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더러운 삶과 마음을 씻는 것이다. 달리 정해진 의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씻김을 받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씻어주는 것이다. 삶 자체가 세례이다. 주님은 삶이 되신 말씀이다.

교회는 서로 더러운 것을 들춰내는 곳이 아니라 씻어주는 곳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씻김을 받고, 다른 사람을 씻어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주님께 씻김을 받기 위해 자신의 더럽혀진 삶과 마음을 주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한다.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죄, 시기심, 이기심, 탐욕, 분노, 증오, 교활함을 씻어주신다. 주께서 우리를 씻어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씻어주셔야 한다. 고통과 근심, 상처를 서로 씻어주어야 한다. 나아가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씻어주는 공동체이다. 교히는 ‘씻김의 공동체’이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