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조선의 절세미인 장희빈 이야기

기고
왜곡된 조선의 절세미인 장희빈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4.27(수) 16:16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위원
조선은 1392년 7월 17일에 건국되어, 1910년 8월 29일 멸망했다. 태조 이성계에서 순종 이척까지 총 27명의 왕이 518년간 통치했다.

왕비는 태조 이성계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에서 27대 순종비 순정효왕후 윤씨까지 실존 왕비는 36명으로 태종 이방원이 내명부 체제를, 왕비는 오직 1명의 일부일처제를 고집했다. 태조 이성계가 고향 함경도와 개경에 각각 1명씩 부인을 두어 생모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후궁출신 마지막 왕비는 장희빈이다. 호칭은 교태전에서 유래된 중전, 중궁, 내전, 곤전, 곤궁을 사용했다. 대한제국 선포 후에는 '중전마마'에서 '황후폐하'로 불렀다. ​왕이 승하하면 대비가 되어 자경전에 살았다.

왕비는 왕의 정실로 국모가 되어 내명부를 관장하며 궁안 살림을 책임진 실세였다. 왕비는 '간택령'을 내려 후보신청을 받았다. 8도의 15~20세의 양반가 규수들은 '단자'라 불리는 사주팔자를 제출했다. 일부 양반들은 딸을 숨겨 간택을 기피했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지만 자칫 목숨부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왕대비와 대왕대비가 간택을 주관했으나 왕이 직접 간택할 때도 있다. 왕비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왕통을 이을 후계자 생산이기에 관점을 거기에 맞췄다.

왕비의 삶은, 호화스럽게 보였지만 궁중 여인들 간 암투로 마음고생이 심했고 정치적 풍랑에 휩쓸려 비극적 삶을 살다간 왕비도 많았고 평균수명은 51세로 단명했다.
'선원록'에 등재된 왕비 36명과 후궁은 138명으로 총 174명이다.

인품과 용모보다는 가문을 중시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에 의하면,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서인들이 '국혼물실'을 맹약, 20명 중 서인 출신 가문이 17명을 차지할 정도로 정략적으로 이뤄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비와 후궁들 중에서 유일하게 장희빈의 미모가 절색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4세에 즉위한 숙종 이순은 증조모 장렬왕후의 처소에 문안인사 때 지밀나인 장옥정을 처음 보게 되었다. 빼어나게 예쁘고 살가와 대왕대비의 총애도 듬뿍 받고 있던 옥정의 미모에 첫눈에 반했으나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특이한 성격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의 후궁 기피증으로 궁녀 접근을 일체 금했기 때문이다. 20살이 되던 해 왕비 인경왕후가 갑자기 죽게 되자 할머니를 졸라 드디어 품에 안게 되었다.

명성왕후는 뒤늦게사 승은 궁녀의 정체를 알고 치를 떨었다. 남인과 연계된 역관 장현의 조카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장현은 당시 조선의 큰 부자였다. 왕실 종친 동평군 이항과 남인들의 큰 손으로 서인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인물이었다.

명성왕후는 서인 집안 출신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50년 넘게 정권을 잡았다. 왕실과 통혼해 왕비를 외척이 됐다. 예송논쟁에서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 선왕 효종을 경시하는 예론을 펴는 바람에 현종과 종친들이 왕권을 업신여긴다며 남인 세력과 한때 손을 잡아 친정이 위기에 처한 뼈아픈 2차 예송논쟁의 추억을 기억한 것이다.

그러나 숙종이 즉위 후 남인들이 오만한 국정 운영으로 종친 복선군 추대의 역모죄로 옥사에 휘말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되찾았다.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 숙종의 당숙들도 사약을 받았다.

이 사건이 발발하기 수년 전 옥정의 삼촌인 역관 장현은 남인들과 가까웠던 사촌형 장형이 젊은 나이에 병사하자 재산을 물려받아 대부호가 되었고 어린 조카들을 거두었고 장조카 희재는 무관으로, 친딸과 조카딸 옥정은 궁녀로 입궐시켜 남인세력과 왕실 종친 동평군 이항을 가까이하며 미래를 기약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대비는 장옥정을 궁 밖으로 당장 내쳤고 계비 간택령을 내렸다. 1681년 5월 서인 송준길의 외손인,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현왕후다. 친정집으로 쫓겨난 옥정을 숙종은 남몰래 찾았고 이 사실을 간파한 남인들과 동평군은 장현의 재정적 지원 아래 세력을 결집해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1683년 12월 대비 명성왕후 김씨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대의 걸림돌이 사라지자 3년상이 끝나고 증조모 장렬왕후는 숙종에게 장옥정을 입궁시키라 명했다.
1686년 봄 28세의 나이로 장옥정이 궁에 다시 돌아오자 숙종은 정말 좋아했다. 숨바꼭질을 하면서 온 궁안을 헤집고 다니며 7살 연하 인현왕후를 미치게 했다. 왕은 창경궁에 '취선당'이라는 옥정의 처소도 마련하고 숙원에 봉했다.

1688년 10월에는 기다리던 아들까지 낳았다. 무려 13년 동안을 기다리던 왕자를 얻으니 그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삼겠다고 했다.

서인들은 떼를 지어 출생한지 두 달밖에 안 된 갓난아기를, 그것도 중인 출신 후궁의 소생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이니 적장자를 얻을 때까지 미루자고 했다.

옥정에게 푹 빠진 숙종은 갓난 아기를 원자로 삼고 옥정을 정1품 희빈에 봉했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고사를 꺼내며 숙종을 비판했다. 왕은 분개했고 오히려 송시열이 지난날 선왕 효종의 은혜를 입고도 예송논쟁 때 정통성을 부정한 배은망덕에 왕권을 업신여겼던 언행들을 용서할 수 없다며 이듬해 2월 송시열의 삭탈관직 성 밖으로 쫓았다. '기사환국’의 정계개편이었다. 송시열과 김수항은 사약을 받았다.
4월이 되자 인현왕후의 투기를 거론했다. “중전이 일전에 선왕과 선후를 꿈에서 뵈었다며 장희빈과 그 원자를 그대로 두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실언을 했고 대왕대비의 국상 중 국법으로 금하는 생신장치를 열었다며 인현왕후를 투기죄와 주륙설판죄를 적용, 서인으로 강등해 쫓아냈다.

왕비 교체를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한 무서운 숙종의 정치 승부수였다. 선왕 때부터 몇차례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신하가 국왕을 능멸하는 폐단이 극에 달했다는 피해 의식을 갖고 1674년 즉위하자 원노 송시열을 내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숙종은 왕권강화는 적통을 확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적장자인 왕비 소생의 맏이가 보위에 올라야만 왕권이 바로 선다는 것이다. 숙종은 현종의 적장자요. 현종도 효종의 적장자로 왕위승계의 정통성을 제대로 지킨 금수저라 자부하며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수렴청정 없이 직접 통치에 들어갔다. 새로 태어난 원자도 보위에 오르려면 당연히 적장자가 돼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 길은 왕비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에 앉혀 원자를 왕비 소생으로 만드는 비상수단을 택한 것이다. 그것만이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맹신했다.

오두인.박태보 등 서인 86명이 중전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상소의 문체를 꼬투리 잡아 주모자들을 잡아들여 압슬과 낙형을 가하고 몽둥이로 입을 쳐서 처형했다. 중전 폐출을 거론하는 자는 역모죄로 다스리겠다 엄포를 했다.

1689년 5월 2일 인현왕후 민씨는 흰 가마를 타고 안국동 친정으로 쫓겨났다.

5월 6일에는 장희빈을 새 중전으로 삼는다는 교지가 내렸다.

그러나 숙종은 1693년 새 중전 장씨를 제쳐두고 젊은 무수리 최씨에게 승은을 내렸다. 중전 장씨에 대한 숙종의 애정이 금방 식어갔던 것이다. 무수리 최씨 외에 다른 후궁들도 찾았다.

중전 장씨는 애가 타 홧병이 났다. 오직 세자의 장성을 기다린 채 그 아름답던 얼굴이 스트레스성 피부염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백약이 무효인 채 어느덧 40을 바라보는, 날카롭고 까칠한 중년 여인으로 변모해 숙종의 죽끓는 변덕을 한없이 원망하며 증오했다.

숙종은 다시 환국을 모색한다. 서인 측 김춘택의 간교한 간계로 남인 정권의 실권자인 동평군과 중전의 오래비 장희재의 뇌물사건을 조작해 거짓 고변을 했다.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권당 남인들을 처벌하고 젊은 후궁 최씨의 서인들에게 정권을 넘겼으니 1694년 갑술환국이다. 5년 전 기사환국처럼 왕비 교체를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숙종은 폐비 민씨를 복위시켜 실추된 민심을 회복코자 했다. 감동적인 드라마도 연출했다. 숙종과 폐비 인현왕후는 애정어린 서찰을 수차례 주고 받았다.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니 어찌 다시 만날 날이 없겠는가?”

“첩의 죄는 죽어 마땅한데 목숨을 보전한 것은 성은에서 나왔습니다. 천만뜻밖에 옥찰이 내려지니 감격의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답장을 읽으니 만나서 이야기한 것 같구려. 열 번이나 펴보는데도 매번 눈물이 납니다. 옷과 가마를 보낼 테니 이제 돌아오시오.”

“옷과 가마가 분수에 넘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로 거두시면 마음이 편할 듯합니다.”

“또 번거롭게 하는구려. 지나치게 사양 말고 오늘 들어와야 하오. 몇 글자라도 회답해 주오.”

이처럼 생쇼를 벌인 것이다.

1694년 4월 12일 숙종은 인현왕후를 경복당으로 다시 맞았고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인현왕후는 그간의 마음 고생 때문인지 종기로 1701년 세상을 떠났다. 이에 세자의 생모 희빈이 복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궁에 돌았다. 이때 장희빈 보다 더 영특한 숙빈 최씨의 고변이 터졌다. 희빈이 인현왕후 민씨를 향한 저주굿을 벌여 중전을 해쳤다는 것이다. 장희빈의 몸부림은 허사가 된 채 결국 장희빈이 받은 것은 오매불망 기다리던 복위교서가 아닌, 숙종이 보낸 사약 사발이었다.

장희빈의 죽음과 함께 남인도 몰락했다. 피 튀기는 당쟁의 주역은 서인에게 돌아갔고 왕위 계승을 놓고 더욱 판을 짜고 치열하게 싸웠다.

소론은 장희빈이 낳은 세자를 후원했고, 노론은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을 밀었다.

1720년 숙종은 죽기까지 변덕이 죽 끓듯 했고 장희빈의 아들 세자 이윤이 즉위했다. 바로 조선 제20대 경종 이균이다. 어미 없는, 경종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영조 이금이 등극해 정권은 또다시 서인들이 차지했다.

역사는 온통 승자인 서인 편에서 기록되었기에 자기세력인 인현왕후는 인자하고 덕성 있는 국모로 묘사했고 남인 출신 장희빈은 무당을 불러 인현왕후를 저주한 악녀로 몰아붙였다. 숙빈 최씨도 가세해 거짓 고변으로 입지를 강화했다. 숙종은 장희빈의 긍녀들을 심하게 고문했고 거짓으로 자백을 해야 했다.

장희빈이 무당을 궁안에 들인 것은 병약한 세자의 병을 치료키 위해서였고 친정이 부자라서 재물도 크게 탐내지 않았다. 사약을 받을 때도 자기 아들 세자에게 누가 될까 봐 순순히 따랐던 것이다. 왕조실록 그 어느 곳에서도 희빈 장씨의 악행에 대해 한 대목도 기록이 없다.

장희재도 일찍히 무과에 급제해 내금위 부장을 지냈고 오히려 서인들의 견제로 승차가 늦었으며 서인들이 그를 '한량'으로 표기해 장안의 무뢰잡배로 잘못 인식되어 왔다.

10여 차례 방영된, 드라마조차 작가가 역사의 고증도 없이 대본을 써 장희빈 일가를 조선의 최고 악녀로 왜곡 시킨 것이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