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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사랑의 방명록’
  • 입력 : 2022. 05.04(수) 10:38
  • 영암일보
박석구
시인

돌아오는 죽음의 서러움과 두려움보다는 이 나이, 뒤돌아 살아온 삶이 흔적은 너무 마음에 들지 않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서글픈 이 시점에서, 돌아오는 삶이 더 암담하고 참혹하다.

이제는 혼자인 잠도 혼자인 아침 커피도 정말 싫다. 한때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으로 치장되고, 해방과 자유로움으로 헤엄치기도 했지만, 가슴에서 흘려보내는 것들이 지금은 거의가 막막함이다.

나를 모든 외로움이라고 부른다. 나를 모든 지겨움이라고 부른다. 나를 모든 절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를 어둠의 촉각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밤중, 진저리로 일어나 창문을 열자, 밀려들어오는 비바람의 습기가 내 살에 엉기어 끈끈하게 달라붙으면서 소름을 깨운다.
방충망에 글썽이며 걸리는 빗방울. 가로등 불빛에 스치어 잡초들 위에 떨어져 스며드는 그리움 같은 잘디잔 반짝임들. 감나무 잎에서 툭툭 살아 돌아오는 중저음의 빗소리. 이 비의 풍경과 소리를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의 낙하로 부른다.

팔에 돋아있는 소름을 문지르며 문득 비 오던 증도를 떠올린다. 되돌아가는 증도 선착장에서 본 썰물의 갯벌은 온통 젖어있었다. 갯벌 한가운데 물길만 이미 돌아가는 바닷물이 아쉬운 듯 조금씩 흘려보내며 자꾸 좁아지고, 비는 얕아지는 물길에 그래도 도움을 보태고 싶은 듯 게속 추적거리며 내렸다.

이때, 그래도 아직은 넓고 싶은 듯한 선착장 주변의 오른편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물길 위를 선회하다 물 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물속에 어른거리던 어린 숭어를 본 거였다. 하지만 다시 더오른 그의 부리엔 먹이가 없었다. 날개의 파닥임이 이제 세월로 젖어들어 너무 느리게 낙하한 것이었다. 오, 그 갈매기를 나라고 부른다.
세척되지 않는 현재 느끼는 쓸쓸한 상념은 점점 지겨움으로 돌아서고, 초라함으로 밀쳐지면서 어느새 내 과거의 모든 그리움으로 흘러간다.

모든 그리움은 가슴 속의 파도를 동반한다. 유년의 마을 풍경이나 어린 나이부터 서서히 자라나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의, 드문드문 밀려오는 기억의 파도는 아련하다. 퇴적층처럼 쌓인 풍경들은 거의 빛바랜 사진처럼 장면 장면들이 정지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하얀 목화밭, 푸른 보리밭, 계단식 논에서 싱싱하게 자라는 벼, 집을 온통 둘러싸고 고개를 흔드는 대나무들, 사립문 바로 옆 울타리에 매미소리와 함께 서 있는 육중한 팽나무, 어두운 골목길, 냇가르르 기고 소나무와 자리한 우산각, 이 풍경들을 나는 먼, 거의 가뭇한, 지금은 없어진 완행열차라고 부른다.

스쳐가는 그리움은 다시 사계를 건너 뛰어 사춘기로 밀려간다, 거기에 누나가 있다. 누나와 만나므이 기억은 거의가 4월의 새 잎처럼 연초록이다.

배꽃의 향기가 남쪽으로 멀리 날아가는 이름이라고 풋풋한 웃음을 환하게 던지며 악수를 청하고 손을 부지런히 흔들던, 내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 문학이라는 내재율의 첫 모임에서 만난, 나보다 두 살 위인 누나였다. 한마디로 지금도 누나의 기억은 환한 웃음이다. 우리가 늘 만났던 가톨릭 회관의 뒤뜰은 듬성듬성 난 잔디와 키 작은 느티나무 몇 그루가 서 있어, 나홀로 있으면 적막한 황무지였지만, 누나만 나타나면 항상 그곳은 아늑한 초원이고 숲이었다.

누나가 깡총거리며 뜰에 들어서서 폭 넓은 교복 치마를 발걸음 따라 좌우로 휘저으며 지나가면, 잔디들은 풀빛을 반짝이며 푸릇해졌고, 누나의 깔깔대는 웃음에 어린 느티나무들은, 잎들을 수없이 팔랑이며 어느새 키가 커지고 무성해져 나는 늘 그 느티나무에 기대어 얘기를 나누었다.

누나와 난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고,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만나곤 했다. 편지는 그저 잡다한 얘기가 대부분이었으나 누나에게서 편지가 올 날이 되면 설레서 하굣길은 거의 달음박질이었다. 그 수많은 편지는 몇 번의 이사 속에서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어느 편지 속 한 구절만은 지금도 내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커 가면서 만난 우리지만, 우리는 어떻게 헤어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너무 좋다.

아련한 누나의 모습들. 담벼락에 핀 장미를 꺾어 머리칼에 꽂고 “나, 이쁘지?”하며 깔깔대던, 약간 어두운 가톨릭 회관의 소강당에서 내 어설픈 글에 곡을 붙여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헤어질 땐 언제나 “잘 가라”며 꼭 손을 냄리어 악수를 해주던 그 모습들.

공부를 해야겠다며 서로 헤어지던 그날, 누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석구야, 네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되어, 네가 당당히 날 만나자고 편지가 오면, 너와 같이 살지도 몰라.”

그 후 나는 편지를 쓰지도 못했다.

택배를 부를까.

상자 속에 들어가 나를 보내고 싶다.

장미 하나 가슴에 품고 어둠의 하루만 견디면

사춘기 적 곱고 넉넉한 누나에게 갈 수만 있다면

낡은 공책 속 주소를 꺼내 본다.

그리움이 하루 종일 부유 한다.

[약력]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 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