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김종수 목사의 ‘하늘샘물 흐르는 곳에’
  • 입력 : 2022. 05.04(수) 10:46
  • 영암일보
김종수
목포산들교회 목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마라.
(창세기 2:17)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 구별할 수 없는 것보다 좋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을까? 무엇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사실 이 기준이 다르기에 인간들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어떤 싸움이든지 절대적으로 선과 악이 정해진 싸움은 없다. 모두가 제 나름대로 옳다고 여기며 싸운다. 서로가 자기는 옳고 상대방은 죽일 놈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문제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눈으로 본 선과 악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의 이해관계에서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애써 구별하려고 하는 자세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아니 지금도 그렇지만 영화를 볼 때마다 이렇게 묻지 않는가?

“좋은 놈이야? 나쁜 놈이야?”

여기서 더욱 비극적인 것은 자기중심적인 선악관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은 ‘선악과를 먹는 날 너희는 하나님처럼 된다,’고 꾄다.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위치에 서게 되어 자기중심적인 선악관을 절대화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자기중심의 ‘의’를 절대적인 ‘의’로 여긴다. 절대이기에 상대를 부정하고, 자기 이외의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반목만 깊어간다. 이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원인이며, 이것이 바로 타락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만든 창조의 현실은 결코 반목과 대립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창조하시되 서로 쌍을 이루게 하셨다. ‘빛과 어둠’, ‘낮과 밤’, ‘창공이라고 할 수 있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땅과 바다’, ‘해와 달’, ‘바다의 생물과 공중의 새’, ‘동물과 사람’, ‘남자와 여자’, 이 모두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다. 빛은 선하니까 어둠은 악하고, 낮은 좋고 밤은 나쁘고, 해는 달보다 더 밝으니 더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빛은 빛대로 아름답고, 어둠은 어둠대로 의미가 있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아름다운 시간의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반목과 갈등, 분열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화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현실은 반목과 갈등과 대립의 실상을 보여 주었다. 무엇이든지 자기 나름대로 선과 악으로 갈라놓고 보는 분열의 실상이었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이 말하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상태가 바로 이 분열의 실상이다. 이것을 분별지라고 한다. 뭐든지 좋고 나쁨,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 더 나은 것과 못한 것으로 인식하려는 지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분별지에 익숙해져 온 것 같다. 이제 겨우 말을 배운 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냐? 아바가 좋으냐?라는 질문부터 던진다. 이럴 때 좀 영악한 아이는 ’둘 다 좋아요‘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우리 어른들은 대답이 시원치 않은지 ’그래도, 다 좋아도 더 좋은 것이 있잖니?‘라고 짓궂게 또 묻는다. 이때부터 흑백논리에 익숙해져 간다. 옳은 것이 아니면 그른 것 밖에 없다. 모 아니면 도다. 한 치의 여유도 없다. 이때부터 비교, 대립의 삶이 그칠 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은 경쟁과 싸움으로 얼룩진다. 우리는 가진 것, 학력, 학벌, 가문으로 인간을 구별한다. 사람을 지배와 피지배로 나눈다.

선악과를 먹은 현실은 남을 죽여야 내가 살고, 남을 눌러야 내가 올라가는 싸움의 현실일 수밖에 없다. 결국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대립과 갈등 관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나 이외에 모든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소유해야 할 대상이다. 지배해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그대로 자연스럽게 볼 수 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의 상대가 아니라 탐욕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현실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관계는 창세기 2장 23절에서 말하듯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까지 여기며,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창 2:25) 관계였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온갖 치부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온갖 허물과 잘못을 드러내도 서로 제 잘못이나 허물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것이다. 상대방의 슬픔과 고통이 제 슬픔이요, 제 고통이었다. 서로의 실수와 과실이 제 실수요, 제 과실이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현실에서는 나 이외의 모든 인간은 지배해야 할 인간이요, 자기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타인일 뿐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문책에 아담은 하와 핑계를 댄다. 창세기 3장 12절에서 아담은 말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서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었던 부부 관계가 어느새 3인칭인 ‘여자 그가’로, 타인으로, 핑곗거리로 바뀐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혹 아이에게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도대체 당신이 아이를 어떻게 교육했기에 이 모양이야?’라고 아내 탓을 하지 않는가? ‘당신이 제대로 벌어다 주기만 했어 봐! 내가 이러나’하고 남편 탓을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아직 원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현실, 더 이상 하나 된 인간관계가 아니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다. 하나님은 마침내 이러한 관계에 저주를 내리신다.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창 3:16)

선악과를 먹은 현실은 끝내 모든 삶의 불행을 하나님께 돌린다. 세상 탓, 사람 탓 속에는 바로 하나님을 탓하는 불신앙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악과를 먹은 욕망의 현실은 인간과 인간이 갈라지고, 인간과 자연이 갈라지고, 끝내는 인간과 하나님이 갈라진 현실이다. 이 갈라짐을 성서는 타락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조차 욕망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시건만 하나님을 차지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욕망이라는 뱀이 여자에게 속삭이며 ‘선악과를 먹는 날 너희는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말한 이유다. 알고 보면 뱀의 속삭임은 우리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라는 뱀의 머리이다.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