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 - 박종권 兄에 대한 페이소스

기고
그리운 이 - 박종권 兄에 대한 페이소스
에세이 ‘사랑의 방명록’
  • 입력 : 2022. 05.15(일) 01:23
  • 영암일보
박석구
시인
녹아내린 초콜릿 같은 밤이었다. 가끔 차량이 도로를 지나가면 전조등을 가로막는 안개가 차량 주위를 허우적거리다가 뒤의 빨간 미등에 어둠과 마블링하듯 휘감기는, 작은 고갯길을 막 넘어가는 그믐의 어느 날이었다. 초겨울의 시작이라고 하기는 그리 춥지 않는 밤. 이제 이 길을 따라서 내려가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작은 마을이 나타날 것이고 오른편 외딴 집이 형이 나를 부른 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번에 왔던 것처럼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장지문에 몇몇의 그림자가 비추이고 흐느낌과 처절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오, 주여.”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내 죄를 사하소서,”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건너서 형이 울부짖고 있는 옆에 슬그머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방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조그만 방에 2,30대의 남녀가 반반씩, 8명 정도가 모두 눈물이 범벅인 채로 벽 가운데 걸린 초상화를 향하여 두 손을 내밀거나 손깍지를 끼고,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실신 직전의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굽혔다 하는 중이었다. 마치 지옥의 한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저 분이 손을 내밀어 꼭 구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앳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 당시 유행하던 파마머리가 아닌 긴 생머리를 방바닥까지 늘어뜨리고, 여느 주변 이들처럼 울부짖지는 않고 있었지만 고개를 숙여 조그맣게 흐느끼고 있었다. 백열등에 드러나는 그녀의 하얀 뒷목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한 겨울밤, 함박눈이 깔린 방죽 둑을 보름달이 비추는 것처럼. 막 흐드러진 백목련처럼. 쨍쨍한 햇빛 속, 물기를 머금은 백사장처럼.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이 그녀의 목 언저리 쪽으로 다가서는 느낌을 받고는 나는 흠칫 놀라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 다음날 형을 만났을 때 형이 내게 물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갑작스런 형의 물음에 속으로는 옷? 두 발로 걷는 것? 언어? 집? 등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났지만 그런 피상적인 질문이 아닌 것 같았다.

“제사를 지내는 거야.”

형은 그때 그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이끄는 그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었다.

“어제 내 여동생이 그러는데... 네가 자기를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 깜짝 놀랐대. 침까지 흘리더라는데? 너 내 동생 좋니? 내가 소개해줄까?”

그 후 형이 아무리 불러도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 분위기에 도저히 맞출 자신이 없었다. 이듬해 봄, 나는 군대를 갔고 돌아와 복학했을 때, 형이 취직했다는 소식을 누군가에게 들었으나 형이 그 여인과 결혼을 했으며 그 종교를 계속 믿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먼 나중 형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도 형을 잊고 있었다. 그때가 1975년 12월의 초였다.

박종권. 1954년 고흥 출생. 형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형이 고등학교 2학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학교는 달랐지만 다니던 학교의 문예반 출신들이어서 자연스럽게 예술제 같은 데서 어울리기 시작했고, 서로가 쓴 글을 보여주며 그 글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사이가 됐으며, 가끔 같이 이야기로 밤을 새우든가 어느새 술을 같이 마시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형의 집은 밤실로, 자그마한 언덕 끝의 낡은 집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생활하였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산수동에서 부모님, 동생들과 셋방을 사는 가난한 시절을 통과하고 있어서, 허구한 날 서로 중간쯤 되는 나지막한 숲에서 내가 어머님이 담가놓은 포도주를 몰래 주전자에 가지고 가, 시절을 한탄하고, 외운 시를 읊조리고, 당시 유행하던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와 트로트를 불러댔다.

형의 웃음은 거의 파안대소였고, 걸을 때 달리는 법이 없었으며, 형의 말투는 늘 조용했다. 퇴락한 조선 후기의 양반을 보는 것 같았다. 형은 문학특기생으로 성균관대를 들어갔고 방학이 되자마자 광주로 내려와 나와 함께 어울렸다. 그런 형이 한 여자를 좋아했을 때, 그녀는 어느 종교에 빠져 있었고 그녀를 따라 형이 그 종교에 몰입될 무렵, 나는 겨우 재수를 거쳐 마음에도 없는 학과의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내가 긴 세월동안 내 식구의 목구멍을 위하여 여러 곳을 휘돌아다니다가 삶에 지쳐 광주에 왔을 때, 1년 선배인 시인 형과 술을 마시는 와중에 형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형이 그동안 시인이 되었으며, 판소리를 하게 되었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형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나는 형이 형답게 죽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종권이가 지인과 서울 어느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셨나봐. 그런데 둘 다 돈이 없었대. 서로를 믿었던 거지. 외상을 하자고 하자 ‘너희를 알지도 못하는데 돈을 가지고 와야 보내겠다’하니까 싸움이 붙었던 거야.”

태권도를 했다며 내 앞에서 늘 앞차기를 보여주었던 형 특유의 발차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상어처럼 어긋난 형의 치아가 생각났다. ‘그대의 순수한 피를 마시고 싶은 흡혈의 욕망이여’라는 고등학교 때 형이 쓴 시의 한 구절도 생각이 났다.

“그리고 둘은 건장한 종업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는 끌려나와 그 건물의 지하주차장에 버려졌대. 덜 대들었던 지인은 당연히 덜 맞아서 거기서 몸을 추스르고 집으로 갔지만 종권이는 1월의 추운 바닥에서 피를 흘리다가 그대로 동사를 하고 말았던 게야.”

어느 음악 감상실에서 값싼 술을 게우며 울먹이던 형의 모습이 겹쳐졌다.

루마니아가 고향인 드라큘라는 웬만하면 예쁜 여자의 목만 노린다. 목에 때가 낀 여자, 목에다 뜸뜬 여자를 싫어한다. 목이 하얗고 긴 여자, 목밖에 없는 듯한 여자를 좋아한다. 나는 사춘기 한때 드라큘라가 되고 싶었다. 루마니아를 찾아가 그 후손이 있으면 내 목을 내주고 긴 송곳니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갈 여비를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금욕주의 반작용으로 원초적 욕망의 상징으로 대두된 드라큘라는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정말 매혹적이었다. 그런 내면의 꿈을 드라큘라 영화가 대신해주었던 아득한 젊은 날. 아, 어두운 밤, 어느 골목길에서, 가로등 불빛에 드러나 창백한 초승달처럼 미끄러지던 그 여자의 목. 소리 없이 다가가 확 깨물고 싶은.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