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 3.1독립만세사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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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3.1독립만세사건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6.06(월) 17:06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주간
일제 강점기 태형과 즉결처분의 무단정치가 극성을 부리던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의 한복판 파고다 공원에서 각급학교 학생대표들과 서울 시민 5000여명이 모여 일제에 항거한 만세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을 계기로 두 달에 걸쳐 독립만세의 열풍은 조선 천지를 휩쓸었고 이 사건을 기획했던 민족대표들은 물론 온 나라가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러나 식민사관에 젖은 친일 사학자 이병도가 조선사 편수회에서 ‘3.1운동’이라고 폄하한 뒤 그의 제자들인 식민사관 추종자들에 의해 똑 같은 역사적 기술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3.1운동’, 북한에선 ‘3.1봉기’ 라고 불리는데 ‘기미독립만세사건’으로 불러야 함이 마땅하다.

일부 진보계열 사학자들 마저도 ‘3.1운동’이라고 고착화 되버려 일제가 호언했던대로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쉬 고칠 수 없는 식민지배가 남긴 잔재의 각인 효과라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기미 만세 사건은 예상을 뒤엎고 전국적 거사로 이어져 2백만명이 참가했고 40.000여명이 일제에 검거 투옥되었고 8000여명의 학생과 민중이 목숨을 잃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항일 투쟁이었다.

‘기미 3.1독립만세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의 나라 바깥 사정은 1919년 1월 18일 세계 1차대전이 끝나고 전승국 27개국이 프랑스 파리 바르세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여 ‘패전국의 식민지들도 스스로 자국의 앞날을 결정할 수 있다’고 선언했고 그에 앞서 1917년, 소련이 주도한, 세계 공산당 회의인 ‘코민테른’에서 소련의 레닌이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은 약소국의 독립을 약속한다”고 선언하여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할 절박한 당시의 우리 민족에겐 한껏 부풀은 희망의 메세지로 들렸었다.

나라 안 사정도 극악무도한 무단통치에 의한 만행과 폭력,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소작농의 토지와 경제적 작취가 극에 달했고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으로 일제에 대한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에 힘 입어 1919년 2월 8일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생 ‘조선유학생학우회’ 회원 10여명을 중심으로 춘원 이광수가 작성한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하여 불씨를 지폈다.

몽양 여운형이 이끌었던, 상해 신한청년당 김규식의 밀명으로 이광수의 친구인 송계백이 조선에 잠입하여 송진우 등 국내인사들을 접근 해 민족적 자존심을 이끌어내 그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의암 손병희의 주도로 천도교계 지도자 16인. 만해 한용운의 불교계 2 인, 이승훈의 기독교 목사 15인 등 민족지도자 33인이 독립만세사건의 거사를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이 유교의 유림 측에 동참을 간절히 제의했지만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매정하게 거절당했다. 입으로만 충성을 중얼거린 서인 노론당 유림들의 한계가 또 다시 드러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의 바람이 불자 우리민족의 민족의식은 더욱 높아졌고 해외를 시찰한 후 국내에 잠입한, 의암 손병희는 독립투쟁을 거국적으로 벌리기로 작정했다. 의암은 “독립운동은 대중화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해야한다”며 독립선언서 작성을 맡은 최남선에게 되도록 온건하게 쓰라고 누차 부탁을 했다.

공약 3장은 만해 한용운이 작성키로 했다. 비폭력 시위로 민족의 희생을 최소화 해 독립의 성취를 희망했고 먼저 천도교 간부들에게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하면서 의연한 결기를 보이며 독려했다. 고종의 인산에 전국의 유생들이 한성에 집결과 그 여파를 노린, 고도의 책략이었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가 인쇄되고 다음날 2월 28일 밤 서울 재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서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3월 1일에 있을 거사를 재확인했다.

그런데 손병희와 민족대표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학생과 일제 경찰들간에게서 자칫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의 기생 주옥경이 경영하던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장소를 변경했다.

이리하여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인사동 태화관에 모인 손병희와 29인의 대표들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든 후, 태화관 주인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열고 있다며 연락하게 했고 일제경찰 80명이 태화관에 들이닥쳐 일본 경찰에 자진해서 체포되었다.

일제경찰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불교대표 한용운은 “오늘은 조선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날이며, 공동합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자”고 외쳤고 참석한 대표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삼창 후 일제 경찰에 차례로 연행되었다.

차에 태워 실려갈 때 군중들은 300여장의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고 태화관 주위에 몰려든 군중들은 민족대표들이 연행되고 있는 차를 에워싸고 감격과 흥분속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따라 외쳤다. 마지막으로 한용운과 최린이 실려갈때는 목이 쉬어 군중들이 소리를 내지 못할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것을 모르고 탑골공원에서 기다리던 수 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2시 30분까지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들을 기다렸지만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대표들이 태화관으로 가서 거세게 항의했지만 손병희는 이해를 시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결국 학생대표와 시민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3월 1일 2시가 되자 청년학생 정재용은 팔각정위로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마침내 시민들은 ‘대한독립만세’ 를 부르며 종로쪽으로 행진했고 총칼이 아닌 맨손으로 만세를 외치며 몰려오는 시위대를 보며 일본경찰은 크게 당황했다.

3.1만세사건은 전국적으로 노도의 물결처럼 퍼졌고 노동자, 농민은 물론 심지어 수원권번의 기생 김향화와 진주기생들도 만세에 동참했고 필라델피아 등 해외 이주민들도 국민대회를 개최해 온 세계가 큰 충격속에 일제에 가혹하게 탄압받는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게 되었고 무장투쟁이 고무되었으며 독립운동의 구심체인 상해 임시정부가 발족하기에 이르렀고 중국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실상은 거사 날짜를 3월 3일을 디데이로 잡았으나 일제의 독살설로 와전된 백성들의 분노에 찬 고종의 인산일이라 피하고 3월 2일은 주일이라고 기독교가 반대 해 결국 3월1일을 거사일로 확정했다.

최린에게 독립선언문 작성을 맡기고 만일을 대비하여 최남선과 한용운에게도 각각 작성케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최남선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규의 아내였던 일본 여인의 안방에서 3주만에 작성했다.

선언문은 마침내 최린에게 전달하여 오세창이 인쇄를 책임졌다. 독립선언문과 공약삼장을 보성학원 내 보성사 인쇄소에서 은밀하게 찍고 있었다. 사장인 이종일과 담당기술자 그리고 사동 등 세 사람만이 참여하여 밤에 커튼을 드리우고 극비로 작업을 진행시켰다.

한창 인쇄가 진행되고 있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즉시 작업을 중단하고 귀를 기울이니 빨리 문을 열라는 고함소리가 빗발쳤다. 바로 종로서의 악질형사 신승희의 목소리였다.

일단 문을 열어준 이종일은 공포와 분노로 오금이 저려 왔지만 이종일은 두 손을 모아 신승희에게 읍소하였다.

“제발 우리 2천만 민족을 위해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달라” 간절히 애원하며 손병희 에게 함께 가자고 그의 소매를 끌었다. 마침내 그 지독한 신승희는 “나는 여기 있을 테니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는 부드러운 대답이 나왔다. 이종일은 단숨에 손병희의 거처로 달려갔고 자초지종을 들은 손병희는 안방에서 서슴없이 돈뭉치를 꺼내주었다. 신승희는 당시 거액인 5천원을 받고 조용히 사라졌으며, 마침내 보성인쇄소에서 2월 27일 21000장을 인쇄 한 후 2월 28일부터 전국에 배포되었다.

드디어 1919년 3월1일 파고다 공원으로 가던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목사 4명이 빠진 29명은 유혈충돌을 피해야 한다며 장소를 손병희의 아내가 경영하던 요정인 태화관으로 옮겨 오후 2시 한용운이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은, 참석자 29명의 태화관에서의 기이한 행적들과 33인 민족지도자들 중 변절자들의 행태는 두고 두고 새겨야될 민족적 과제요. 풀어야할 숙제다.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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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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