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북전쟁 이야기

기고
6.25 남북전쟁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6.17(금) 20:05
  • 영암일보
김오준
논설주간

우리 조국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벌써 70여 년이 지났다.

1950년 6월 25일에서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길고 긴 전쟁을, 우리는 '6.25 동란'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6.25 남북전쟁'으로 일컫는 추세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선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며 아직까지도 잘못을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은 채 미사일을 쏘아대며 쥐뿔도 없는 주제에 무력을 과시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 아무래도 북한 전역에 코로나가 만연되어 김정은 정권이 무너질까봐 애써 술수를 부리는 것만 같다.

전쟁 발발 72년을 앞두고 전쟁의 과정을 함께 살피고자 한다.

북한 김일성은 남침을 하기 위한 첫 준비로 1948년 1월 1일 평안도에 '강동정치학원'을 비밀리 설립하여 이남 출신 핵심 남로당원을 대상으로 중국 항일연군 출신 장교들에 의해 특수훈련을 시켰다. 강동정치학원 출신이 지리산 빨치사령관 이현상과 남로당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이다. 이들은 휴전이 가까워지자 입북하려 했으나 외면당한채 지리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가족들조차 시체 인수를 거부했다고 전한다.

1949년 김일성은 중국 내전에서 부패한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가고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자 중국해방전쟁에 참여한, 김두봉의 의용군과 무정의 동북항일연군 5만 명을 그들의 원에 의해 북한으로 입북케 했다. 이들은 일본군과 수차례 싸워온 경험에다 그 유명한 태항산 전투 등 온갖 전투경력을 갖춘 일당백의 뛰어난 전투원들이다. 또한 김일성은 남한에 간첩을 보내 이승만 정권의 혼란을 보고받고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 노리고 전쟁을 준비했다.

반면에, 상해 임시정부 시절 독립의 방안으로 '외교적 독립안'을 일관되게 주장해 단재 신채호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은 이승만은 귀국 후 대통령이 된 후에도 군사력 배양은 외면한 채 '북진통일'을 입으로만 부르짖은 무능한 정치 지도자라고 진보 역사가들은 비판하고 있으며 그 평가에 동의한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남로당 박헌영을 데리고 쏘련의 국가원수 스탈린을 면담 '조국해방전쟁'을 일으키면 5일 안에 통일하겠다며 스탈린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만류했고 중국 모택동의 협조부터 먼저 구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1949년 6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을 만나서 온갖 회유 끝에 허락을 받아냈다. 1949년 6월 30일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함으로써 스탈린과 모택동이 우려했던 미국의 전쟁개입은 절대 없다는 주장을 펴내어 끝내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를 외면한 채, 1950년 1월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선언해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권에서 제외하는 우를 범했고 김일성은 쾌재를 불렀다.

1950년 5월 쏘련의 스탈린은 군사무기 지원을 김일성에게 굳게 약속하고 북한군을 데려다 비행훈련까지 시켰다. 또한 옹진반도를 우선적으로 기습공격하라는 조언까지도 해주었다.

이에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에 북한의 각료 회의를 긴급 소집해 남한이 북침을 해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을 했다.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 출신 정예병 50,000명에 북한군 75,000명이 쏘련제 탱크 242대와 항공기 211대, 각종야포 3,500문을 주무기로 38선을 넘어 남침한 것이다.

이승만은 남침 사실을 미국에 통보하고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취침에 든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통화가 불발되자 부관에게 미국이 계속 방관하면 "국내에 있는 미국인 2,500명을 전부 사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은 다음날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해 불법남침으로 규정하고 연합군을 파견키로 결의했다.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무너졌고 6월 27일 이승만은 "용감한 국군이 선전하고 있으니 걱정말라."며 거짓녹화 방송을 대전에서 하고 대구까지 도망을 갔다가 너무 멀리 왔다고 진언하자 대전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6월 28일, 한강다리 폭파를 지시해 서울시민 800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 원수는 한국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고 6월 31일 스미스 특수부대를 한국전에 참전시켰다. 미군이 참전하면 그냥 북한군을 쉽게 물러갈 것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대패했다. 맥아더 원수는 당황했고 전세를 다시 분석했으며 유엔군들은 7월 1일 참전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일본군과 장개석군을 토벌했던 전투경험이 있는 노련한 기갑장교 무정 부대와 이중영웅 칭호를 받은 방호산 부대에 의해 전세는 밀리고 밀려 낙동강을 최후 보루로 삼고 미 해병대를 중심으로 안간힘을 쓰며 버텨냈다.

전투경험이 적은 우리 국군은 지레 겁을 먹고 싸울 엄두도 내지 않고 도망가기에만 급급했다. 이를 보다 못한 백선엽 장군은 선봉에 서서 전투지휘를 하며 "도망가려면 나를 먼저 쏘고 도주하라."고 외쳐 마침내 부하들이 감탄해 사기를 되찾아 전투에 임했다는 비화가 전한다.

드디어 유엔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성공률 ‘5000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을 9월 15일 감행해 성공했고 9월 28일 빼앗긴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으로 진격했고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했다. 이승만은 통일대통령이라도 된 듯이 기뻐 날뛰며 평양의 군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국군은 11월 1일 압록강에 이르러 수통에 압록수를 담으며 기뻐했다.

기쁨도 잠시, 중공은 내전에 참여해 큰 도움을 받았던 무정과 김두봉과의 약조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0월 27일 1차 공세에 나섰고 소수병력으로는 안되겠다 판단해 11월 19일 100만 명의 군대의 인해전술을 구사했다.

중공군과 유엔군은 11월 26일부터 12월 11일의 15일에 걸친 장진호 전투가 붙었다. 중공군의 엄청난 숫자에 밀린데다 영하 30도의 혹한은 유럽의 따뜻한 기후에서 살았던 유엔군들은 한번도 경험치 못한 추위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투에 참가한 미국, 영국, 한국 해병 30,000명 중 사망, 실종자 6,000여 명, 부상자 5,000여 명, 비전투 요원까지 합하면 손실병력이 17,843명으로 절반 이상을 잃었다. 중공군도 120,000명의 참전자 중 사상자, 부상자를 포함해 48,156명에 달했다. 이후 중공군은 3개월 동안 전투에 임하지 못하고 뒷수습을 했다고 한다.

유엔군과 중공군 모두 다 동상으로 목숨을 잃은 숫자가 절반을 넘었다. 어찌나 추위가 가혹했던지 시체로 벙커를 구축할 정도였고 의약품도 모두 얼어버려 사용할 수 없어 그 피해는 더 컸다.

온갖 고생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유엔군들은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그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을 전개했다. 중공군의 참전에 격분한 맥아더 원수는 만주와 중국본토에 원자폭탄투하를 요청했다. 미 의회는 오랜 토론만 계속한채 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사태의 추이를 관망 중 1951년 1월 소련은 맥아더의 원폭투하 요청에 겁을 먹고 미국 대통령 투르맨을 설득했고 자칫하다간 자국도 안전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휴전협정을 제의했다. 전쟁의 도화선을 제공해놓고 자국의 안전을 위해 꼼수를 둔 것이다. 이것이 강대국들의 국제 질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국의 희생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투르맨은 3차 대전을 핑계로 맥아더의 요청을 거절했고 휴전에 응했다. 영국의 처칠 수상도 한몫 거들었다고 한다.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는 해임되어 본국으로 귀국했고 휴전은 지지부진했다. 휴전선의 위치를 북한 김일성과 팽덕회는 3.8선으로 기준점으로 정하자고 주장했고 미국은 현 점령지를 기준으로 주장한데다 중립국 선정을 놓고도 대립이 첨예했다.

이후 공산군과 유엔군, 그리고 국군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고지전'과 '태극기 휘날리며'를 생생히 연출하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지루한 공방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마침내 조인되었다. 북한 김일성과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서명했다. 휴전선 길이는 248km다.

민족상잔의 6.25 남북전쟁으로 우리 민족 600만 명이 사라졌고 수많은 이산가족의 아픔 속에 코메디언 송해도 고향을 꿈속에 그리고 그리다 타계했다.

6.25한국전쟁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우방군 54,000명이 이국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다 전사했으며 부상자도 100,000명이 넘었으며 유엔군 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의 아들, 워커장군의 아들 샘 워커 등 미군 고위장성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한국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중국공산당 모택동의 장남 모안영도 미군의 네이팜탄의 공습에 의해 사망해 북한에 묘가 있다.

요즘까지도 우리가 즐겨쓰는 '낙동강 오리알'도 낙동강 전투 때 미군의 무시무시한 폭탄 네이팜탄의 집중 투하로 오갈 데 없는 북한 인민군의 처량한 신세를 빗대어 비아냥 거리는 뜻이 내포돤 용어라고 한다. 6.25남북 전쟁의 북한 주력군이 중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들이 같은 동족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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