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금아

기고
옥금아
에세이 ‘사랑의 방명록’
  • 입력 : 2022. 06.25(토) 15:08
  • 영암일보
박석구
시인
옥금아, 나 지금 선 보러 간다. 이 나이에 무슨 선이냐고? 아니. 뭐 조금 외롭기도 하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저녁을 먹고 초저녁이 되면 저 마루에 나와 앉아 담배를 피우잖니.

그런데 저 서쪽하늘 위에, 목포라는 도시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지상의 불빛을 뚫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쩔 때는 가슴이 아파올 때도 있어. 어릴 적에는 그 수많은 별이 샛별 주위로 너나없이 다정했는데 인간이 만든 인공의 별에 녹아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지.

고개를 돌려 광주 쪽을 보면 거의 별들이 죽어있는 듯 보여. 가슴이 아프지. 그러기에 외로움이 덜 할지도 몰라. 혼자서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면 가슴이 더 미어질 거야.
*옥금 : 우리 집 개 이름.

옥금아 너나 나나 여기 온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너는 그래도 새끼를 6마리나 낳았잖니. 비록 황갈색의 네 몸통 색깔은 하나도 없고 하얗고 검은 애들이었지만 말이다. 네 새끼들도 지금쯤 태어난 지 1년이 넘었으니 아마 네 손주도 낳았을 거야. 너의 헌신적인 보살핌은 내가 잘 안다. 네 몸이 아무리 젖을 만드느라 말라가도, 모든 새끼들에게 아낌없이 젖을 물리고 핥아 주고, 내가 너에게 준 밥까지 새끼들이 다 배를 채우고 만족한 표정으로 잠에 떨어진 뒤에야 네가 먹는다는 걸. 그때 널 보며 나도 누군가를 너처럼 보살펴 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

옥금아, 핏빛 노을을 아니? 올 봄 내내 가뭄이 지속됐을 때,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면서 온 누리에 비치는 해의 모습은 거의 핏빛이었어. 해도 아마 자신이 비추는 강렬한 빛으로 인해 씨앗이 트지 않고 겨우 싹이 난 작물이 말라가고 풀들이 시드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터졌겠지. 너도 알겠지만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고 작물들이 모든 가지에 물을 가득 머금을 때, 노을은 노란색에 가까웠어. 마루에서 바라보는 해의 포근한 미소에 동백잎들은 얼마나 해맑은 표정들이었는지 몰라. 포근하다는 풍경은 아마 그런 걸 거야.

옥금아, 읍에 장이 서면 나는 가끔 먹을거리를 사러 갈 때, 마을 잎의 반듯한 도로보다 마을끼리 통하는 길로 차를 몰기도 한단다. 여기 마을들은 월출산 밑이라 이름들도 산 밑 마을답게 지어져 있지. 우리 마을은 월암, 옆 마을은 월산, 그 옆 마을은 호동, 또 그 옆 마을은 주암이고 이곳을 합쳐 월곡리라고 부른단다.

어릴 적, 막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어느 겨울방학의 밤이었지. 나는 옆 마을로 마실을 가 밤새 놀다가, 나를 배웅하던 여자 애와 새벽녘 달이 안개와 함께 우리를 감싸는 것 같아, 둘이 보듬고 그만 길 옆 뫼똥의 풀밭에 쓰러졌던 기억이 새삼스럽구나. 그 옆 마을은 내가 지금도 단 하나의 '옛사랑'이라고 호명하고 있는 아이와, 5.18이 끝나고 터진 가슴을 누르며 집으로 내려와, 이 마을에 왔다가 지독한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고. 또 그 옆 마을은 마을 이름답게 마을 앞에 놓인 배 모양의 바위 주변에서 밤이면 밤마다 나를 기다리는 아이의 속절없는 사랑에 애를 태운 시절이 있던 곳이지. 내가 어쩌다 그 길로 다니는 것은 다 젊었던 옛날의 연민일 거야.

옥금아, 너는 거기까지 가 보지는 못했겠지만, 우리 마을 냇물이 물 아래 마을을 걸쳐 바다와 만나는 곳이 있었단다. 지금은 목포 쪽을 막아 영산호라는 거대한 호수로 변하고 말았지만, 예전에 이 조그만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강에도 물의 잠자리가 어딘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강을 따라가다 보면, 강물이 그리는 물결이 둔덕을 어루만지며 소풍을 온양 재잘거리다가도, 푸르른 갈대더미를 만나면 갑자기 조용해지곤 하는 곳에 이르지. 거기서부터는 더 이상 갈 길이 없어지고 강물이 넓어지는 곳이었어.

그런데 거기 서서 바라보는 조용한 강물들이 혹시 잠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지. 물 밑에 강풀들이 모여 요가 되고 고기들이 모여 이불이 되는, 긴 바다 여정의 시작을 위해서 말이다. 먼 세월을 견디고 이곳에 귀향을 한 내가 더 이상 다른 잠자리를 꾸밀 여력이 없구나. 내 삶의 잠자리는 이제 여기가 아닐까 생각한단다. 너는 진도에서 태어나 나에게 왔지만 나의 잠자리를 지킬 유일한 친구가 아닐까도 여기며.

옥금아, 이제 만나러 갈 시간이 다 되어가는구나. 무슨 말을 서로 나누겠지만 한 모금의 설렘도 한 모금의 기대도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오래도록 익숙해진 홀로된 잠자리에 누군가 스며든다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야. 날마다 무서워지는 외로움의 무게도 힘들겠지만 그것을 못 이기는 나 자신이 되어 그저 의지할 곳을 찾는 사람은 되기 싫기 때문이지. 하여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가 봐야겠구나, 옥금아. 만나서 얘기를 해 보면 어떤 결정이 나겠지. 너는 어느 쪽이 좋으냐.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