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와 산 아래

기고
산 위와 산 아래
김종수 목사의 ‘하늘샘물 흐르는 곳에’
  • 입력 : 2022. 08.01(월) 10:26
  • 영암일보
김종수
목사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무리 중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2~29)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이 산 위에서 예수님은 놀라운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셨다. 마가복음 9장 3절은 예수님의 몸에서 광채가 났으며 너무나 깨끗하게 보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변화산상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4절에는 예수님께서, 아주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를 동시에 만나신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이 장면은 율법과 예언이 예수님을 오실 메시아로 지적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며, 곧이어 있을 예수님의 영광스런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본문 7절에 의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하나님께서 확인시켜주시는 것으로 이 변화산상의 영광을 극단적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산 아래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산 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있다. 예수님을 두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있었듯이 우리는 말씀의 선포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메시지를 응답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 된 영광이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산 위에서, 현실이 아닌 예배에서이다.

그러나 산 아래의 현실은 다르다. 우리가 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산 아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다르다. 그 현실은 마가복음 9장 14절 이하가 말하는 어느 아버지의 아들이 갖고 있는 질병과 같은 현실이다. 18절은 이 아들의 증세를 말해주고 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이 증세는 간질병 증세이다. 마가복음에는 병명이 나오지 않았지만 같은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마태복음 17장 15절을 보면 ‘간질’이라고 나와 있다. 간질병은 머리가 명령한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병이다. 몸이 머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가 없다.

바로 산 위가 아닌 산 아래의 현실이 이러하다. 산 위 우리가 예배에서 ‘아멘’ 한다고 하더라도 그 ‘아멘’대로 살 수 있는 산 아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오늘 우리가 만난 간질 병 걸린 한 아들의 현실은 특정한 어느 아들의 현실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실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이 말 그대로의 현실이다. 우리를 똑바로 살아가게 하는 산 아래 현실이 아니다.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치열한 경쟁이 있다. 저마다 욕망과 허영의 거품을 물고 경쟁하는 현실이다. 그리고 분노와 한 맺힘 속에서 절망과 후회로 이를 간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증세인 ‘파리하다’는 말은 뺏뺏하고 경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현실은 우리를 부드럽고 여유있게 만들지 못한다.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뺏뺏하고 경직된 삶으로 몰고 간다.

이것이 바로 산 아래 현실이다 산 위의 영광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야 할 산 아래 현실이다. 그렇기에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산 위에 그냥 눌러 있자고 말한다. 5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여기 그냥 있자고 말한다. 산 위에 그냥 있고 싶고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복잡한 산 아래는 생각도 하기 싫 으니 여기 산 위에 초막을 짓고 눌러 살자고 말한다. 옛날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님과 함께 살고 싶어 한다. 이단이 그러하다. 골치 아픈 가정이고 직장이고 다 팽개치고 곧 다가올 종말을 기다리며 산 속에서 살자는 식이다.

산 아래의 이야기는 14절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간질병 걸린 아들을 둔아버지가 찾아와 고처달라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 마침 예수님이 산 위에서 오신다. 제자들이 이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하며 탄식한다.

믿음이란 산 위의 영광이 산 아래에서도 영광으로 역사하는 것을 말한다. 산 위, 예배에서의 말씀이 산 아래 현실에서 삶이 되는 것을 말한다. 산 위의 승리가 산 아래 현실에서도 승리의 삶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토록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마가복음 6장 7절에 의하면 귀신을 쫓는 능력까지 받았다. 그러나 귀신들린 이 아들을 고치지 못한다. 마침 예수님이 오셔서 이 아들의 병을 고친다. 과연 예수님은 어떻게 이 병을 고치셨을까?

28절에서 제자들은 묻는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29절에서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새번역 신약전서에 의하면 ‘기도하지 않고서는 이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고 번역되어 있다.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다. 그런데 기도해도 별로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밤이고 낮이고 철야기도를 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움직인다. 실은 하는 일을 돌아볼 틈도 없이 이것 하다 안 되면 저것 해보고 하는,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수선만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보기에는 부지런하다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아닐까?

22절에서 이 아들의 아버지는 말한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바쁘게 산다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다급하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비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방향도 없이, 자신의 일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볼 틈도 없이, 이것 해보고 안 되면 저것 해보고, 닥치는 대로 사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불에 뛰어들었다가 뜨겁다고 반대로 물에 뛰어들어 물에 빠져 죽는 꼴은 아닌가? 아직 이리 뛰고 저리 뛰면 될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불에도 뛰어들고 물에도 뛰어든다. 결국 불에 타죽고 물에 빠져 죽는다. 불행히도 그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삶을 바쁘고 부지런한 삶이라고 착각한다. 사실 바쁜 것이 아니라 방황하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귀신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쁜 삶을 잠시 멈추기 바란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제 욕심의 기도가 아니다. 지금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묻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기도가 없이는 산 위의 영광이 산 아래의 삶이 되지 못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우왕좌왕하는 것을 중지하기 바란다. 산 아래 바쁜 일과 한가운데에서도 숨을 돌리고 산 위 하늘을 보기 바란다. 땅은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 있다.

예수님은 25절에서 이 귀신의 이름을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에는 입을 다문 벙어리 귀신이 들린 우리다. 그리고 제 욕심을 긁어주는 목소리 외에는 어느 것도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 귀신이 들린 우리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아 버린 것이다.

27절에서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일으킨다. 여기 일으킨다는 희랍어 동사는 ‘에게이로’라는 말로 ‘부활한다’는 말과 같다. 땅의 욕심을 접고 하늘 뜻을 묻고자 기도하는 자의 능력이다. 하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자의 능력이다. 죄 된 삶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만이 일어설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나?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