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中年)

기고
중년(中年)
  • 입력 : 2021. 11.02(화) 10:18
  • 영암일보
박석구 시인 에세이스트 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이제 나의 성욕도 군불의 마지막 불씨 같다. 아침의 곧추섬은 일주일의 어느 하루, 희미한 종족번식의 자국만 남은 느낌이다. 근시였던 내 눈에 노안이 진행되면서 안경을 벗어도 가까운 주변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하자 지하철을 탈 때면 옆에 앉아있는 젊은 여성에게 곁눈질이 심해지는 묘한 눈치만 더 발달된 것 같다.
박정희 정권이 온 국민이 죽을 둥 살 둥 암기를 해야만 했던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우리 국민 모두를 거룩한 탄생으로 미화할 때가 있었다. 그런다고 해서 그 당시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흰 천을 머리에 두르고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한 다음,
“여보, 우리 민족중흥을 위해 자식 하나 만듭시다”하면서 엄숙한 사랑의 퍼포먼스를 하지는 않았으리라. 사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밤중 애매한 눈짓을 교환하거나, 밥상을 발로 차고 그 사이에 요를 깔고 느닷없이 엉키어 요란을 떨어서 ‘어쩔 수없이 태어난’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우리의 탄생을 비하할 필요는 전혀 없어 보인다. 나나 당신이나 이런 저런 요란을 떨어 우리 아이들을 성급한 속도로 이 세상에 내보내지 않았던가.
모르지. 이제 스물여덟이 된 내 장남도 어느 여인에게 뜨거운 씨를 뿌려 ‘역사적 사명’을 스리살짝 이행했는지.
봄이 온 광주천에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이란 새가 정말 쌍쌍이 몸을 부딪치다가 때로는 입맞춤까지 하면서 서로의 사랑을 각인시키며 유유히 물길을 거슬러 헤엄을 치고 있다.
한 겨울엔 커다란 무리를 지어 집단생활을 하며 웅크리고 있던 원앙이지만 봄기운이 그 도톰한 엉덩이를 툭툭 치게 만든다. 이미 겨우내 서로 슬그머니 얼음장 밑에서 발 간지럼을 한 쌍쌍이 금슬로 치면 최고라는 명성에 걸맞게, 눈꼴사납게, 서로의 엉덩이를 시간만 나면 부딪치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외로운 수컷 몇은 이미 짝을 맞춘 암컷의 엉덩이를 부리로 어리광을 부리며 건드려 보지만, 남편이 옆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것을 감지한 암컷은 달아나고 있는 외톨이 수놈의 엉덩이 아래쪽만 죽기 살기로 쪼아대면서 내쫓아버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최재천 교수(이화여대 생명공학과)에 의하면 암컷 원앙이 낳은 알에서 부화된 새끼의 DNA를 검사하면 터무니없게, 부부관계인 수컷 원앙의 새끼가 아닌 다른 수컷의 DNA가 검출되는 것이 다반사(50% 이상)라고 한다. 즉, 원앙 암컷의 일부분은 남편이 딴 곳에 한눈을 파는 사이, 어두운 풀숲 어디서 다른 수컷에게 슬그머니 엉덩이를 내주었다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수컷이란 자가 아내가 시장을 간 사이, 옆집 유부녀 암컷이 혼자 있는 것을 간파하고 겁탈을 일삼아, 전자발찌를 채울 수밖에 없는 치한이 된 건 아닌지. 진화심리학자인 미국 미시간대학의 바비 로(Bobbi Low) 박사의 말에 의하면 ‘유전적으로 다양한 자식을 둘 경우, 환경이 변해도 생존이라는 도박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라고 암컷 입장에서는 솔깃한 이론을 늘어놓지만 도덕과 양심은 또 다른 이론을 펼쳐서 성은 늘 양면성을 지닌 것 같다.
내 2년 선배인, 남원에서 젖소로 낙농업을 하고 있는 형에게서 어느 날 후배가 일식집을 개업했다며 개업 인사차 점심을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내가 호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형은 이미 어떤 여자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약간은 깡마르고 수척한 몸매가 형의 넉넉한 몸에 비해서 왠지 조화가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내 애인이야”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형의 소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회 서너 점을 막 입으로 가져가 우적우적 씹는 중이었다. 형은 몇 잔의 소주를 순식간에 마시고 그녀가 말도 없이 계속 먹는 것에 열중한 모습이 미안했는지 “나는 잘 먹는 여자를 좋아해”하며 멋쩍은 웃음을 날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나이 때는 말이야. 남자는 성욕이 줄어들고 여자들은 폐경이 오거든?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그동안 몸속에서 분비되던 호르몬이 줄어든다는 뜻이야. 그러면 각자의 몸에서 풍기던 좋은 냄새가 사라지고 슬슬 노인 냄새가 나기 시작해. 손자들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안으면 기겁하고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그거야. 그래서 우리 나이 때는 다시 사랑을 해야 해. 사랑의 감정은 어느 나이에도 있는 거야. 사랑을 하면 서로 서서히 다시 호르몬이 분비되고 하물며 젊어지기도 한대. 열심히 사는 게 사랑하며 사는 거야.”
참으로 귓속에 쏙쏙 들어오고 지금의 허전한 내 마음을 적셔주는 지당한 말씀이었다. 그녀는 이제 탕 국물을 그릇째 입에 대고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이틀 동안 냉장고 안에 묵혀있던 찬밥을 그냥 김치와 고추장으로 비벼 먹을까 아니면 콩나물 천원어치를 사다 국을 끓여 말아먹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무등산 증심사 아래에서 낮에는 커피와 음료를, 밤에는 가벼운 술을 파는 카페를 운영하는 팔촌뻘 되는 여동생이었다. ‘저것이 또 장사가 잘 안 되니까 내 돈 빨아 먹으려는 수작이겠지’하고 “나 오늘 정리할 일이 있다”라고 시큰둥하게 내뱉으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오빠, 오빠, 오늘 술값 걱정 말고 저희 집에 오세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한다. 그 말에 혹해 나는 카페로 갔다.
“내 친한 언니야. 인사해.”
그녀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에게서 알아낸 사정은 이러했다. 나보다 두 살 아래라는 것. 2년 전에 남편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 아들 딸 남매를 두었고 딸이 시집가서 손녀딸을 낳았다는 것. 야생초 연구 모임에 들어가 산에 자주 다닌다는 것. 야생초 술을 담는 게 취미라는 것. 이제 외롭다는 것.
약간의 취기가 서로 오르자 우리는 좀 더 화기애애해졌다.
그녀가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오빠, 내일 삼겹살 사주실래요? 전화 주세요.”
나는 그 말에 꼭 삼겹살만 먹고 그냥 헤어지자는 말이 아님을 어렴풋이 느꼈다. 내 귀에 속삭이는 그 말이 너무 젖어 있었다.
다음날, 집 밖에 나섰을 때 찔레넝쿨이 무성한 잎들을 하늘로 치켜세우며 가지들을 담장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제 고개를 한없이 젖히고 있는 꽃자리와 시들어 갈색 꽃술들만 무더기로 남아버린 찔레꽃 진 자리를 바라보며 문득 어젯밤의 그녀의 말을 생각해냈다.
전화를 할까 말까. 참 애매한 나이다. 덤불 속으로 바람이 일고 슬그머니 봄이 숨는다. 하염없이 봄날이 가고 있다


[저자약력]
영암 군서면 출신
2011년 에세이스트 수필 등단
2014년 에세이스트 베스트10
2015년 문학 에스프리 시 등단
현)에세이스트 작가회의 홍보위원장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