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위하여

기고
일상을 위하여
고주孤酒 - 3부
  • 입력 : 2026. 07.10(금) 09:47
  • 영암일보
<사진=박석구 문인>
이제 아침에 일어날 때면 허리며 팔과 다리 등이 굳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잠을 잘못 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허리가 뻐근해 잠자리에서 일어서기가 힘이 들고 굽어진 허리를 곧추세우며 방문을 연다. 저기 산등성이를 깨우는 여명을 바라보며 나는 밭에서 자라고 있는 마늘과 양파, 쪽파나 상추, 배추와 유채, 시금치와 갓들을 돌아보며 걸어야 허리가 펴진다.
손톱을 깎는다는 것은 내가 아직 손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요, 발톱을 깎는다는 것은 나는 아직 걸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날마다 수염을 깎는 것도 내 얼굴을 아직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제는 사과나무 사이로 단감 묘목 50주를 지인에게서 가져와 하루 종일 심었다. 작은 둔덕을 만들어 그 위에 사과나무를 심었던 탓에 오로지 삽으로만 구덩이를 파야 했다. 구덩이 하나를 파는데 보통 스무 번 정도 삽질을 해야만 했고 어스름이 깔리고 나야 일을 끝낼 수 있었는데 몸을 씻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온몸이 저리고 오른쪽 허벅지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무리를 한 탓이었다.
어제 온다던 비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자분자분 내리고 있다. 비가 오고 나면 날씨가 추워질 거라는 예보에 수도꼭지를 낡은 수건으로 감싸고 지하수를 퍼올리는 펌프를 작년에 덮어 두었던 솜이불을 창고에서 꺼내와 다시 덮어준다.
아, 올여름은 얼마나 더웠던가. 30도가 넘는 날들이 3개월 넘도록 지속하였고 그 덕분에 모든 애벌레들이 성충이 되기 위해 번데기로 갈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몸체를 부풀리며 작물과 과수의 잎들을 모조리 갈가먹는 통에 얼마나 많은 살충제를 뿌렸던가. 땅콩이나 서리태 같은 작물들은 씨앗을 만들 마음이 없는지 줄기만 뻗어 나가는 통에 낫으로 줄기들을 자르느라 땀은 얼마나 흘렸던가. 사과나 무화과도 열매는 몇 개 달리지 않고 하늘을 향해 가지만 키워, 가지 끝부분을 얼마나 잘라냈던가.
마늘은 실한 것만 골라 심었는데도 오랫동안 싹이 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양파는 모종을 사다 심었으나 뜨거운 열기에 반이 말라 죽었다.
쪽파는 키만 크고 뿌리 분열을 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상추는 씨를 뿌렸지만 하나도 나지 않았다. 장날에 모종을 사와 다시 심었다.
배추는 원예상에서 모종을 구해 정성껏 심었으나 다음 날 아침에 가 보니 반쯤을 청벌레가 갉아 먹었다.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지. 날마다 그것들을 잡느라고 허리가 구부정하게 휘었다.
유채도 몇 군데 말라 죽었다.
시금치와 갓은 같이 씨를 뿌렸는데 뿌린 씨앗만큼 싹이 나와 잘 크겠지 했는데 비닐멀칭을 하지 않아서 온갖 풀들이 덮는 통에 며칠을 호미로 풀들을 메는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서리도 두어 번 내리자 벌레들이 사라졌다. 겨울을 나는 작물들은 이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무성했던 나무들의 잎도 다 떨어지고 잎들 때문에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아늑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보이는 저 산들은 붉은빛이 사라지고 검푸른 모습으로 햇볕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아침이 오면 옷을 챙겨 입고 산길을 걸으며 오늘은 무엇을 할까 생각한다.
이제 집으로 돌아오면 텃밭을 한 바퀴 돌며 심어진 작물들이 밤새 잘 있는지 돌아본다.
이제 방으로 들어와 방을 쓸고 닦고 나서 부엌으로 가 간단하게 준비한 아침을 먹는다.
이제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틀고 이를 닦고 몸을 씻는다.
이제 PC를 열고 메일을 점검하고 써야 할 글을 바라보다 괜시레 부끄러워 PC를 닫고 만다.
이제 내 1년 선배인 동네 의원에 가서 감나무를 심다가 생긴 근육통을 위하여 물리치료를 한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과나무 가지치기를 시작한다. 오늘도 딱 다섯 그루만.
이제 읍내 작은 마트에 가서 소주 몇 병과 담배를 사서 돌아온다.
이제 며칠 전 마을 이장이 마을 논에서 수확한 쌀로 만들어 나누어 준 떡살을 끓여 점심을 먹는다.
이제 오늘은 예약이 없는 단 한 채인 농어촌 민박(일명 펜션)에 들어가 뭔가 정리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를 점검한다.
이제 하우스에 들어가 아직 털지 못한 서리태를 털다가 '애구 내일 털지'하며 그만두고 만다.
이제 다시 읍내로 나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반찬가게를 하는 여자친구 집에 들러 끓여준 커피를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무물김치를 한 줌 얻어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돌아와 어제 펜션에서 나온 수건과 내가 벗어놓은 옷가지에 세제를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이제 마루에 앉아 산 쪽으로 날아가는 비둘기와 동백나무 사이로 넘아가는 해를 보며 내 나이도 해 질 녘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한다.
이제 어제 남은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지개를 가스 불에 올리고 오늘 가져온 열무김치와 이웃에서 담았다고 가져온 며칠째 된 전복장을 꺼내 TV 앞 식탁에 앉아 뉴스를 보며 소주 한 병과 함께 오늘을 마무리한다.
이제 혈압약 한 알을 입에 털고 자리에 눕는다.


- 책 <늙은 시인들의 동네> 중에서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