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방탕아 - 아우구스티누스

칼럼
돌아온 방탕아 - 아우구스티누스
재미있는 철학이야기
  • 입력 : 2024. 03.28(목) 11:29
  • 영암일보
<사진=강성률 철학박사>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작은 도시 타가스테(오늘날 알제리의 수크 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섯 살 때 문법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장난과 유희에만 몰두하였다. 이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철학자 아플레아우스 밑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열여섯 살 때 가정 형편이 완전히 기울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불량한 친구들과 사귀어 도둑질과 거짓 연애 등 나쁜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집안의 사정이 조금 나아지자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기 위해 카르타고(북아프리카)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난폭한 학생들과 우정을 맺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는 대철학자 키케로의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후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열아홉 살 때 어머니(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후였음)의 허락을 받지 않고 노예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였다.
그리고 곧 아들까지 낳았다. 고향을 떠난지 4년 만에 그는 아내와 세 살 된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이단 종교의 지도자가 되어 온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를 쫓아내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물아홉 살 때 로마의 교사로 초빙을 받았는데, 이때에도 카르타고에 와있던 어머니 몰래 로마로 도망쳤다. 1년 후에는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의 강론에 큰 감화를 받았다.
그러던 중 서른 두 살 되던 해의 늦은 여름, 한 정원에서 “펴서 읽어라!”라고 하는 어린이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이에 신약성경을 집어 우연히 펼친 곳을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는 “열락과 술주정, 음란과 방탕, 싸움과 시기를 버리고 낮에 행동하는 사람처럼 단정합시다.” (로마서 13:13-14)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 곧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영세 준비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열두 살의 양가집 딸과 약혼하였다. 이 일로 14년 동안 동거하여 아들까지 있는 여자를 떠나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였다. 약혼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 2년 후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 친구로부터 수도사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회개한 후 새로운 결심을 하였다.
아들을 위해 30년 동안 정성으로 기도했던 어머니는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약혼녀에게 파혼을 선언하였다.

서른일곱 살에는 타가스테의 사제직을 맡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교회에 바친 다음, 교회 구내의 사택으로 옮겨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게 된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학과 철학 분야의 책을 쓰는 데 보냈던 바, 반달족의 유린이 3 개월 동안이나 계속될 때에도 아우구스티누스의 성당과 도서관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죄를 회개한 적이 있다.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한 것, 구구단 외우기보다는 ‘트로이의 목마(木馬)’ 이야기를 더 많이 한 것, 극장에 자주 간 것 등도 모두 죄라고 생각하였다. 나아가 젖먹이 때 젖을 달라고 너무 보채며 큰 소리로 울었던 일조차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도 한탄해마지 않던 젊은 시절의 방탕이 없었다면, 한갓 냉혹한 신학자나 자기 신념에만 매달리는 고지식한 철학자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방탕과 죄로 인하여 그의 위대함은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늘날 통용되는 거의 모든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였으며, 기독교의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고 있다.



[약력]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한국 산업인력공단 비상임이사
한재골 아카데미 원장
유튜브 채널 '강성률철학티비'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