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한 내 고향, 짠한 내 영암…이 애틋한 마음 어떻게 전할까

인터뷰
짠한 내 고향, 짠한 내 영암…이 애틋한 마음 어떻게 전할까
지방선거 특집 <뻔뻔한 인터뷰>
예비후보 릴레이 초대석 ②
박소영 전 목포부시장 직무대행

5남 3녀 ‘재롱둥이’ 막내딸
외교관 꿈꾸는 소녀에서
영암의 신사임당으로

딱 ‘한 달’ 다니려던 공직 생활
40년 될 줄 꿈에도 몰라
  • 입력 : 2022. 02.09(수) 16:55
  • 유우현 기자

<편집자주>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언론사들은 한창 바쁜 시기다. 그래서인가. 이 후보 저 후보, 이 신문 저 신문, 죄다 같은 소리다. 같은 후보가 같은 사진으로 같은 답변을 한다. 지루하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어서 그런 거 따질 게 아니다’는 근엄한 소리, 넣어두시라. 민주주의의 근간이 ‘지루함’의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기자도 지겨운데 독자들은 오죽할까. 편두통이 몰려온다. ‘읽히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직업적 사명감 때문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선거철 ‘뻔’한 사람들과 ‘뻔’하지 않은 얘기를 나눈다. ‘뻔뻔’한 인터뷰다. 지난주 배용태 후보에 이어, 이번주는 박소영 전 목포부시장 직무대행을 만나본다.

박소영 전 직무대행, "군민들께서 내 마음을 열고 진심을 보신다면 나를 부려먹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마음을 어떻게 내놔야할지 늘 고민이다."


박소영 전 직무대행은 ‘신사임당’이다. 오해 마시라. 띄워주는 게 아니다. 타지에서 살지만 영암에서 근무하는 나는 영암에서 사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났는데, 박 전 직무대행의 얘기가 나올 때면 가끔 언급되는 것이 ‘신사임당’이었다. 공직에 몸담을 당시 특유의 ‘올곧은’ 성품이 어쩐지 신사임당을 닮았다는 얘기다.

도발적인 칭찬이었다.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목포시정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장도, 40여 년의 공직생활도 모두 ‘뻔’한 얘기였지만 신사임당은 체급이 다른 수식어다.

해서, 나는 견딜 수가 없이 궁금했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초면에 다짜고짜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영암의 신사임당인가.

- 영암의 신사임당! 드디어 뵙는다.
“제발, 남들 들을까 무섭다(웃음). 감사하지만 내겐 너무 과분한 표현이다.”

- 그 엄청난 별명의 유래가 어떻게 되나.
“나는 공무원 재직 당시 좀 유별날 정도로 원칙을 중시했다. 아주 작은 민원 업무도 정직하고 청렴하게 처리하려 노력했다. 사실, 대한민국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나와 같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목포시) 최초의 여성국장이자 부시장 직무대행까지 하다보니 더욱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아무튼 몸 둘 바 모를 별명이다. ”

- 신사임당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민망하니까 그만!(웃음). 나는 5남 3녀 중 막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가족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에, 남에게 사랑을 많이 주고자 노력한다.

어렸을 땐 늘 아버지 무릎에 안겨 있던 재롱둥이였다. 아버지 무릎에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아버지가 무릎에 앉혀놓고 머리를 따주셨다. 나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공무원까지 됐다.

학창시절의 박소영 전 직무대행. 고등학교 때까지 아버지가 ‘직접 무릎에 앉혀두고 땋아줬던’ 양갈래 머리가 눈에 띈다.

- 공직 입문 계기가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건가
그렇다. 원래 내 꿈은 외교관이었다. 영어가 정말 좋았다. 밤새 영어 공부를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영어만큼은 반에서 1등이었고 전교에서도 순위권에 들었다. 6년 내내 영어 공부밖에 몰랐다. 고3이 돼서 외교관을 꿈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하필 그 타이밍에, 집안 사정이 기울었다. 아버지가 빚더미에 앉으셨다. 내게 공무원 시험을 권하셨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부탁을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사실 딴마음이 있었다. 떨어지겠거니 하고 설렁설렁 시험을 본 것이다.

하지만 웬걸, 덜컥 합격하고 삼호읍사무소에 발령까지 났다. 별 수 있나. 안 간다고 버텼지.(웃음) 10일 정도 지났을까? 읍사무소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차라리 시험 안 봤으면 다른 사람이 합격이라도 했을 텐데, 괜히 시험 봐서 안 오는 것은 무슨 심보냐"라며 하소연 했다더라. 참다못한 아버지가 나를 조용히 타이르셨다. "막내야, 딱 한 달만 근무해보거라. 그 후엔 너 알아서 하렴"이라고 하셨는데, 그땐 몰랐지. 그 한달이 40년이 될 줄은...

- 소위 말하는 공직자 체질?
글쎄, 체질이라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어려운 업무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려운 업무를 요구했다. 여성이라서 쉬운 업무를 맡기보다는, 당당하게 기피 업무를 요구하여 기어이 성과를 냈다. 민원계장으로 근무할 땐 민원봉사대상과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모범 공직자에게 수여하는 녹조근정 훈장도 수훈했다. ‘노인 목욕권 지급’ 아이디어를 창안하고 노인 건강축제를 개최하여 어르신 복지에 크게 기여한 보람도 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친 공직생활이었다. 단 하루도 대충 한 적이 없었다.

- 고향은 어디인가
지금은 현대 삼호 중공업이 위치한, 갈마산 근처의 바다를 끼고 있던 마을이었다. 93년까지도 부모님이 거주하셨다. 초등학교 내내 갈마산을 넘으며 4km 거리를 통학했다. 그 길목에 신촌 저수지가 있었는데, 얽힌 사연이 하나 있다. 당시 신촌 저수지엔 마름 열매가 자랐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여서 그걸 직접 따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 뒤로는, 예상대로다. 저수지에 빠진 거다. 어린 나이에도 정말 '이제 죽겠구나' 싶었지. 천만다행으로 근처에 낚시꾼이 한분 계셨다. 내 머리를 잡고 번쩍 들어서 구해주신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생명의 은인이셨다. 지금까지도 그분이 누군지 못 찾고 있다.

고향 영암을 생각하면 애틋함과 '짠'한 마음이 든다. 충분한 정주여건을 갖췄지만 그만큼 살아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짠한 고향, 기회가 된다면 공직생활처럼 모든 걸 바쳐서 살려내고 싶다.

젊었을 적 친구들과 함께. 사진 가장 오른쪽이 박소영 전 직무대행.

- 취미는 무엇인가
일과 공부가 취미다. 여러가지 시도하기는 했다. 골프도 해보고 여행도 가봤지만 전부 재미없더라. 오히려 공부 생각만 더 났다.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대학을 다녀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직에 있을 땐 공무원들끼리 공부하는 그룹이 따로 있어 수월한 면도 있었다. 공부가 제일 재밌고 일하는 게 좋다. 가끔 '나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정치적인 질문 딱 하나만, 군소 정당 소속으로 아쉬움은 없나.
내 최고 장점이자 단점이 오직 한 길만 가는 것이다. 소속 정당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야 여러 정당 거치고, 나 또한 다른 정당에서 지속적으로 '콜'이 왔다. 하지만 내 성격에 그렇게는 못 간다. 흡사 망한 친정에 바가지 끼얹고 나가는 기분이 든달까.

다만 정당 내부 사정상 무소속 출마는 고려하고 있다. 입당이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군민 의견 고려해서 입당하겠다. 결국 정당보다는 군민에 충성해야 하니까.

- 그 군민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린다.
영암에서 나고 자라 ‘월출산의 정기를 타고난 여자’라는 소리도 들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게 한 원동력이었다. 나를 키워준 월출산과 고향에 보답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그 사명감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 뜨겁게 불타고 있다. 내 고향 영암에 봉사다운 봉사를 하고, 헌사다운 헌사를 바치고 싶다. 그야말로 월출산 바위 빼고 모든 것을 바꿀 준비가 돼있다.

그 마음을 어떻게 내놔볼까. 어떻게 해야 내 진심을 알아줄까? 군민들께 이 애틋한 사랑을 어떻게 전해드릴까 늘 고민하고 있다. 내 마음을 열고 이 진심을 보신다면, 나를 부려먹을 수밖에 없으리라. 내 짠한 고향, 내 짠한 영암, 군민 곁에서 울고 웃으며 영암의 미래를 준비하겠다.

사랑하는 어머니, 8남매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가족은 늘 박소영 전 직무대행의 힘이었다.

본 기자와 인터뷰 중인 박소영 전 직무대행.(오른쪽)
유우현 기자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