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골 들국화가 묻는 것

칼럼
피아골 들국화가 묻는 것
[다시 제도 혁명을 넘어 삶의 혁명으로(1)]
  • 입력 : 2026. 08.06(목) 09:53
  • 영암일보
▲김경호 변호사
1907년 가을, 지리산 피아골의 연곡사가 불탔다. 새벽에 들이닥친 일본군의 기습으로 의병장 고광순이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구례의 선비 매천 황현이었다. 그는 불탄 절터에 사람들을 모아 무덤을 만들고 시 한 수를 남겼다. 새로 만든 무덤은 높이 솟았는데, 곁에 핀 들국화는 누워 있다고. 황현은 고광순이 생전에 부탁한 격문을 끝내 써 주지 못한 일을 두고두고 부끄러워했고, 3년 뒤 나라가 망하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남 의병에 명문가의 종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성의 안규홍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사람이었지만 의병 대장이 되어 일본 군경과 싸웠고, 1909년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의 집중 공격 끝에 붙잡혀 대구에서 순국했다.
제도의 눈으로 보면 의병전쟁은 실패했다. 나라는 망했고,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일제가 닦았다는 길은 오늘 우리가 무심히 달리는 국도가 되었다. 그러나 삶의 눈으로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광복이 되자 보성 군민들은 성금을 모아 머슴 출신 의병장의 비를 세웠고, 구례 사람들은 표지 하나 없던 고광순의 무덤가에 순절비를 세웠다. 양반과 머슴을 가리지 않고 의로운 죽음을 기억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반면 그 시절 침략자에 빌붙어 권세와 부를 얻은 이들은 광복 뒤에도 이 땅의 기득권으로 살아남았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우리는 여러 번의 혁명으로 왕과 총독과 독재자를 걷어냈지만, 누구를 기억하고 누구를 부끄러워할 것인가 하는 삶의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검찰과 사법과 언론의 개혁이 제도의 비석이라면, 그 비석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국 보통 사람들의 손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무덤 앞에 서 있으며, 어떤 비를 세우려고 하고 있는가.

2026. 7. 23.
도올 한국독립운동사 다큐 중에서
오늘 이 땅의 개혁의 방향을 다시 묻다


[약력]
육군대학 법무실장
군사법 교관
합동군사대학교 법무실장
국방부 외부 인권교수
합동군사대학교 명예교수
영암일보 yailb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