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이 그어진 슬픈 우리 역사 이야기

칼럼
38선이 그어진 슬픈 우리 역사 이야기
  • 입력 : 2021. 11.09(화) 13:38
  • 영암일보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우리 한반도는 우리나라 국민들만 모르는 사이에 당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몇 번의 분단 선이 긋기가 논의되었다.
우리 민족의 의사는 전혀 외면한채 오직 힘있는 제국들이 자국의 이해관계만을 자기네들끼리 우리는 완전히 배제된 채로 한반도는 38도선으로 두 동강이로 분할된 슬픈 역사를 겪어야 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 분할은 4번이나 있었다.
첫째, 668년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는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려 했지만 신라의 결의와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항쟁에 밀려 결국 대동강선으로 밀려났다. 당나라는 자신들의 영역을 한강선 이남으로 확대하려 했지만 675년 기벌포 전투와 매소성 전투에서 패하면서 한 대동강 이남을 포기하였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때의 명나라와 일본의 한반도 분할안이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한양과 평양까지 내준 조선은 명군을 받아들여, 평양을 다시 찾았고, 남해에서 이순신 장군의 분전으로 일본은 더 이상 전장을 확대할 여력이 없어졌다. 일본은 지구전으로 전환했고 더 이상 싸울 수도, 그 철수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강화회담을 제안하여 명과 평양에서 회담을 열었다. 일본은 대동강변 분할선을 제안했다. 당연히 한양 북방까지 회복한 명은 반대했으나 일본은 1593년 6월 조선의 반, 즉, 8도 중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 남부의 4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조선분할안을 다시 꺼냈다. 이 제안을 명의 회담대표 심유경은 수용하려 했으나 조선과 명나라 조정의 반대에 부딪쳐 거부되었다.
세 번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전에 제기된 일본에 의한 한반도 분할안이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청군이 한양에 자신의 군을 파견해 맘껏 조선을 능욕하다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청군에 이어 일본이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이 원하지 않은 온갖 만행을 벌리며 두 나라가 조선에서 대립을 벌이자, 영국이 청나라와 일본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남북 분할론을 제시했다.
청은 영국에 수락 의사를 전달했으나 한반도 독점을 노리던 일본은 거절했다. 결국 청일전쟁이 벌어져 일본은 청을 한반도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청이 물러나자 이번에는 러시아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만주와 연해주를 확보하기 위해 청을 압박하면서 점차 한반도까지 확대하려 했다. 이에 놀란 일본은 1896년 러시아에게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 분할을 제시한다. 먼저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선 분할안이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려했던 러시아가 부정적 반응을 보이자 일본은 서울을 경계로 한 반분론(半分論)까지 제시한다. 이러한 음모에 대해 조선은 알지도 못했고, 물론 아무런 대책이나 주장 하나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러일전쟁이 터져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었고, 한반도는 일본에 의한 수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네 번째, 일본의 항복으로 끝나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미소의 이념적 대결장에 놓였고 뒷일이 예측되지 않는 38도선 분할이 급속하게 이뤄졌다.
미국은 당초 신의주 바로 아래와 함흥을 미국 점령 지역으로 확보하는 40도선과, 평양~원산을 잇는 39도선 확보를 원했지만 소련이 이를 받아들이기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포기하고 대신 38도선을 분할선으로 제시했고, 소련이 찬성해 확정됐다. 미 국무부의 실무자 본스틸 브라운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에 의해 기획되어 그어진 3.8선이 결국 남북의 국경선이 되었고, 이후 6.25전쟁의 휴전회담시 전쟁을 정지시키는 휴전선이 오늘의 분할선이 되었다. 미.소에 의해 38도선이 그어졌지만 당시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이 38선을 철폐하려는 운동에 소극적이었다. 잠정적 분할선이라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치단체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제대로된 대응도 없었다. 문제 제기나 항의는 물론 저항활동도 없었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해방군과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들어왔고 곧 우리 손으로 국가를 만들게 되면 자연스럽게 분할은 없어질 것이라는 희망적 인식만을 갖은채 이 38선이 우리민족을 2개로 분할하고 또 전쟁으로 치닫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1945년 8월 8일에 소련은 이미 합의한 얄타회담의 결정대로 점령국들 중 처음으로 북한 땅에 들어왔다. 미국의 원자폭탄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된지 이틀 후였고, 풀루토늄 폭탄 '팻맨'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이었다. 소련은 매우 치밀하게 행동했으며 천천히 남쪽으로 내려갔다. 8월 10일이 되어서야 소련은 동북해안의 항구도시 웅기에 도착했다. 8월 24일에 북한의 수도 평양에 도착하였으며 8월 28일에 미국과 합의된 분리선인 38선에 도달했다. 소련군은 계속해서 남진하여 그 당시 38선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개성까지 발을 들여놓기도 했지만 다시 뒤로 후퇴를 했다.
​ 북한의 소련군 점령지 사령관은 슈티코프였으며 그는 극동 제1러시아 전선의 정치위원이었고 1948년 북한 정권 수립후 3년간 평양 주재 초대 러시아대사를 역임했다. 슈티코프는 스탈린에게 완전히 복종했으며 공식적인 '메가폰'인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즈다노프는 1947년 9월 '두 진영 이론'으로 냉전을 위한 모스크바의 공격적 노선을 주장했다.
스탈린의 한반도에 관한 결정들은 거의 슈티코프에 손에 의해 좌우됐다.
소련 점령지역의 민간행정은 한국 이민자 출신 안드레이 로마넨코 장군이 이끌었다. ​
한편 1945년 9월 8일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군이 한국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군사 퍼레이드가 서울에서 열렸다. 미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연합군의 최고사령관이었던 더 맥아더장군은 남한 점령군 사령관으로 하지 장군을 임명했다. 맥아더가 하지를 임명하게 된 이유는 오키나와에 주둔한 그의 부대가 지근거리에 있는 유일한 부대였기 때문이다. 하지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미국 점령지역에서 좌파 성향이 드러난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물론 김구가 이끌었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 1947년 설립된 미국가안전보장회의 전신인 워싱턴의 국무 육군 해군 조정위원회는 소련군이 진입하기 시작한 지 이틀 후인 1945년 8월 10일 한반도의 지도를 보면서 소련과 증가하는 분쟁을 고려해 한반도의 중앙에 분리선을 긋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확신한다. 독일의 분단에도 적용되었고 10년후 베트남의 분단에도 이 원칙을 재적용하였다.
​ 이처럼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관한 미래 비전 같은 건 미국이나 소련에게 있어서 아예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양측의 공동 관심사는 자원과 공간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기들이 차지하는 것이었다. 1945년 한국에 대한 스탈린의 구상은 소련 위성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직접적인 위험이 생겨나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기초를 확립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 소련의 외무성에서는 이미 1945년 가을 중국에서 마우쩌둥의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 어떻게 하면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더 크게 할지에 대해서만 심사숙고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가능성 들 중 하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소련 점령구역 바깥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동항을 확보하는일에 몰두했다.
​ 미국의 입장도 한반도는 동아시아 전체 대륙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최고의 관심구역이 아니었다. 1950년까지 한반도에 대해서나 1949년까지 중국에서 장제스의 투쟁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미미하기만 했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부장관 딘 애치슨의 '원들레'에 관한 연설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이 연설을 통해 그가 말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어선'은 한국과 타이완은 제외되었다. 미국의 관심은 북쪽으로는 알류샨 열도에서 시작해 남쪽으로는 필리핀에서 끝나는 선에 있었다. 그 안에는 일본과 미국의 중요한 군사기지인 오키나와가 있는 류큐 열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 이처럼 38선의 역사가 미국과 소련에 의한 단순한 그들 자국의 이해관계로 시작되었고 결마로 결정되었다.
1945년 9월 7일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며 발표했던 맥아더 포고령 제1호를 보면 점령(Occupation) 또는 점령하다 (Occupy)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며
포고령 전문에는
“내 지휘 하에 있는 승전군이 오늘부터 38도 이남의 한국 영토를 점령한다.
”라고 적시되어 있다.
또 포고령 제3조에는 있는 “‘점령군’에 대한 모든 적대적 행위 또는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위에 대하여는 강력한 처벌이 가해질 것이다 ”라는 문구에는 점령군이라는 직접적인 표현도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세 차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를 버렸다. 첫째는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다. 둘째는 1945년 얄타회담이다.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38도선이 결정되었다. 셋째는 1950년 에치슨 라인이다. 한반도를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했고,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했다. 세 번 다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분단된 38선의 비극을 초래했음을 우리들은 직시해야 한다.


[저자약력]
금정면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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