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호남 사림의 인맥형성 이야기

칼럼
조선시대 호남 사림의 인맥형성 이야기
김오준의 심심풀이 한국사
  • 입력 : 2022. 01.27(목) 17:35
  • 영암일보
월봉 김오준
시인 / 광주문인협회 이사
1392년 7월 17일 신흥 무인 세력 이성계와 정도전의 신진사대부에 의해 조선이 건국하고 한동안 호남의 선비들은 출사를 거부했다. 개국 세력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이색과 최영. 정몽주를 추모하거나 개인적 친분에다 학통을 이은 호남 출신 사대부들은 대부분 낙향해 은거했고 뒤이은 세조의 왕위찬탈과 무오. 갑자 양대 사화의 환난 중에 참혹한 죽음을 목도하고 보신책으로 향촌에 정착하며 학문을 닦으며 정국의 추이를 관망했다. 이들은 절의와 사림 정신을 표면에 내세운 채 마음속으론 집권 세력 훈구파 사대부들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적 견해를 견지한 채 겉으론 풍류를 즐기는듯했으나 내심은 중앙 정부에 대한 반골적 성향의 싹을 키웠다.

호남 사림의 인맥 형성의 과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치 권력의 명분을 유교 논리에서 찾고, 현실 인식도 역시 유교적 규범의 실천에 두었다. 특히 도학과 의리를 중시하는 전통은 조선 전기 사림의 기본 덕목이자 실천 논리로 확립되었고 의리 실천의 문제가 가장 높아진 것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사육신의 도전에다 1498년의 김종직의 조의제문 무오사화와 폐비 윤 씨와 연루된 1504년 갑자사화, 그리고 1519년의 기묘사화로 이어졌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사림들은 성리학적 논리와 명분으로 온전히 무장된 채 왕권과 결탁된 훈구파 집권 세력에 대항하다 결국은 탄압을 받아 몇 차례 무너졌다. 그러다가 그들의 명분과 사회적 입지가 새롭게 인정받게 된 것은 1506년의 중종반정이었다.

호남을 ‘인물의 보고’라 불렀는데 호남의 선비들은 연산조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눈치만 보다가 중종반정을 계기로 호남의 사림들이 중앙에 진출케 되었다.

진출의 가장 큰 계기는 당시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출신 학포 양팽손의 사마시 입격 동기로 절친에다가 화순으로 귀양 온 조광조와 학포의 아들 양응정의 사제 결연과 과거 시험관 양응정과 율곡 이이와는 좌주 문생의 특별한 인연으로 기호학파의 단초가 되었다.

조선 초기 호남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은 다른 지역에 비해 활발하지는 않았지만, 성종 이후 점진적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명종 이후 급격히 늘어났고, 주요 요직에도 진출하였으니, 중종 때 ‘호남삼걸’로 지칭되던 최산두. 윤구. 류성춘 등 문과 급제자들을 통해서 호남 사림이 주목을 받게 되어 선조 때는 박순이 좌의정에. 노수신이 우의정. 유희춘이 대사헌에 임명되어 16세기 호남 사림은 정국 운영의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 연산군 때 경상도 출신 탁영 김일손이 스승 조광조의 조의제문을 꺼내들어 무오사화의 계기가 된 단종과 사육신의 신원을 주장한 '소릉 복위 문제'에 호남 인맥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 중종 7년 호남 출신 경연관 소세양의 주장에 의해 그동안 잠자던 복위 논의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 되어 세조의 왕위찬탈에 동조했던 훈구파에 대한 과감한 도전은 무려 5개월간에 걸친 긴 논쟁 끝에 마침내 복위의 전교가 내림으로서 사림파의 뜻이 관철되었고 1515년(중종 10)에 일어난 순창 삼인대의 '신씨 복위 사건'으로 호남 선비들의 기개는 정점을 찍었다.

중종 왕비 신씨 복위 상소는 조선 전기 사림 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사림파의 결속력과 정치 참여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주목된다. 담양 부사 박상. 순창 군수 김정. 무안 현감 류옥에 의해 이루어진 이 상소사건은 중종반정의 중추인 박원종. 성희안. 류순정 3공신의 정치세력을 축출하려는 사림들의 정치적 혁신이었다.

이 상소 사건으로 박상은 남평으로,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훈구파 기득권 세력들의 전횡에 대한 저항을 여지없이 보여주었고 훗날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정암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부르짖게 한 디딤돌이 되었다.

호남 지방의 사림의 구심은 장성의 하서 김인후에서 출발한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얽혀진 호남 사림의 인맥은 최부. 송흠. 박상. 박우. 양팽손 최산두. 기준. 송순. 윤구. 임억령. 오겸. 나세찬. 양산보. 임형수로 연결되었고 이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거나 학문을 교류하면서 호남 사림 문화의 꽃을 피웠고 그 뒤를 이어 류성춘과 류희춘. 이후백. 이장영. 박순. 박광전. 박광옥. 기대승. 정개청. 최경회. 고경명. 정철. 김천일. 백광훈. 최경창. 이발. 임제 등은 비록 당색과 학맥에 따라 대비되기도 하지만 성리학적 학문적 견해는 거의 일치했다.

이처럼 16세기에 향촌 지배 세력인 사림은 중앙의 집권 세력인 훈신들과 치열한 접전을 펼치면서 중앙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호남 사림들도 현량과 등 사림 등용 책에 힘입어 중앙에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정국 운영의 주도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명종 때에는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성격에 따라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호남 사림은 크게 송순 계열과 서경덕 계열로 나누어졌다. 선조 8년 1575년 중앙정계가 동서로 분당 되면서 송순 계열은 서인으로, 서경덕 계열은 동인으로 나뉘었다. 송순 계열의 중심인물은 정철. 고경명. 김천일. 이후백 등이었으며, 서경덕 계열의 중심인물은 이발. 이길 형제와 윤선도. 정개청 등이다.

16세기 정국의 주도적 세력으로 성장하였던 호남 사림이 17세기에 들어와 큰 이변이 일어났는데 바로 1589년의 정여립 모반사건이다. 이른바 '기축옥사'로 호남 사림들은 이후 등용이 억제되었으며, 호남 사림은 핵심세력화에 실패하여 이후 중앙 정계에서 멀어졌다.
기축옥사는 중앙정계에서 세력을 확대해 가는 동인에 대한 서인의 반발로 사건 전담 정철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이김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동인 계열의 호남사림이 몰락함으로써 중앙정계에서의 호남사림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17세기 이후 호남사림이 근기 출신의 서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열세에 놓이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기축옥사는 전라도 피폐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정여립의 행적과 기축옥사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이후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들었고 그들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1583년 예조 좌랑을 거쳐 선조 18년(1585) 좌의정 노수신의 천거로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어 본래 서인이었으나 동인으로 변절하였다. 그는 '천하공물설’, ‘하사비 군론’을 주장하며 혁명적 사상을 펼치며 대동계를 조직했다.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탈된 행동이 역모 사건의 빌미를 제공해 기축옥사는 율곡의 죽음을 계기로 동인들의 손으로 넘어간 정국의 주도권을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서인 측에서 변절한 정여립의 의심스러운 사상과 행동을 꼬투리 삼은 대재난이었다. 정여립의 자살로 역모 사건은 사실로 굳어졌고, 사건의 조사와 처리가 서인 정철에 의하여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정여립과 한두 번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까지 사건에 연루되어 무참히 투옥되고 처형당했다. 동인의 거두 이발과 그의 형제들, 남명 조식의 제자로 빼어난 학식을 지녔던 최영경, 호남 사림의 중망을 한 몸에 모았던 정개청, 동인으로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사건 초기 위관을 맡았던 정언신 등이 죽임을 당했으며 이산해, 정인홍, 유성룡도 유배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후 3년여에 걸친 옥사로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로 무려 1천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처형되는 대 옥사로 발전하였다. 기축옥사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으며, 이후 오랫동안 호남 출신들은 정치.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받았다.

1596년(선조 29) 우의정 이원익이 임금에게, “전라도는 임진년의 병란 이후로 국가에 공이 많거니와, 양반 중에서 근왕한 자는 다 호남 사람입니다. 호남 사람을 필히 거두어 써야 하겠습니다."라 상소했고 1597년(선조 30) 좌의정 김응남이, “전라도 사대부들은 현저한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유념하도록 하소서!" 하며 또 상소를 올렸다. 마침내 선조도 1597년 정유재란으로 강토가 초토화되었을 때 과거 기축옥사로 인해 호남인물의 정치적 진출이 차단되었던 점을 인정하면서 그해 2월 선조는 전라도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멀리 있는 남도 백성들아 짐의 말을 들을지어다.

생각하여 보니 지난 기축년의 역변 이후에 걸출한 인물들도 오랫동안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골짜기에 외롭게 홀로 향기를 품고 있으며, 아름다운 옥이 형산에 광채를 감추게 되었도다. 이제야 난을 당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도다."라며 선조는 왜란을 당하여 인재난에 처하여서야 호남인에 대한 정치적 소외와 차단의 사실을 인정하고 부당하였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호남사림의 등용과 관련한 변덕쟁이 선조의 교서 내용은 지켜지지 않은 채 호남사림들의 등용 제한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진출이 어려워지고, 국정운영에서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함에 따라 향촌 사회의 사풍도 퇴락하여 조선말 매천 황현이 호남의 사풍에 대하여 “인재가 들끓고 절개와 의리로 이름 높았던 호남이 변하여 비루한 시골로 전락하였고, 차츰 괴상한 곳으로 변해 나라에서 이곳을 대우하기를 대개 송도와 서북지방처럼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인재들의 진출이 막혀 벼슬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라고 비통해했다.

행동하는 양심의 호남사림들의 특성은 나라가 환란에 직면하면 마치 벌떼와도 같이 여기저기서 의를 내세우며 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분연히 의병항쟁의 대열에 참여하였고 목숨을 바친 의병의 숫자에 있어서도 호남을 따를 수 없다. 전란이 끝나고 다른 지방 의병들은 수십 년을 더 살고 높은 관직에 올라 영화를 누리다가 간 사람들도 많았건만 전라도 의병들은 대부분 전란 중 순절했다. 서슴없이 몸으로 실천 행동화하는 호남 사대부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자랑스럽고 구별된 일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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